주차된 벤츠를 긁은 사나이
어제 밤 주차해둔 차를 긁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지금 내려갈게요."
- 아 차는 아까 긁었고 지금은 저는 집에 들어왔어요. 안 내려와도 돼요.
여기서 느낌이 싸했다. 통화 내내 사과는 없고 현금으로 처리해달라는 이야기만 반복하더라고. 내 소중한 첫 벤츠가 얼마나 다쳤나 확인하지 않고서는 잠도 못 잘 것 같아 내려가서 사진을 찍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흑흑. 수리비를 검색해 보다가 잠에 들었다.
오늘 아침. 출근하려고 일어나 차를 확인했다. 내가 눈이 침침한가? 차에 난 상처 모양이 어제밤에 본 것과 조금 다른 것 같다.
날이 밝아서 그런가? 혹시나 해서 사진첩에 들어가 어제 찍어둔 사진과 비교. 어라 이거 명백히 다른데...?

그렇다. 내 차에 컴파운드질이 되어 있었다. 하...
어질어질하다. 아닐거라 믿으며 가해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 사진 찍으려고 좀 닦았습니다.
아. 겁나 당당하네.
"저한테 안 물어보고요?"
- 어...
"물은 뿌리고 했어요? 먼지 닦고?"
- 아니요.. 그냥 했는데..
그렇다. 먼지를 컴파운드로 뭉쳐 즉석에서 사포를 만들고 그걸로 뒷범퍼를 골고루 문질러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기 충전기 덮개에도 흠집이 생겨버렸다.
이 경우는 명백한 재물손괴다. 형사처벌이 가능한 범죄라는 의미다. 운전중 사고야 실수라 치더라도, 저건 고의성이 명백하다. 손상 범위는 컴파운드가 닿은 모든 면이고...
혹시나 이 글을 읽을 독자분께서는 절대로 따라하지 말자. 칠이 벗겨진 부분만 배상하면 될 문제에서, 컴파운드가 닿은 모든 면적을 배상해야 하는데다가 형사처벌 우려도 있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보험접수나 빨리 해 주세요."
-먼저 공업사에 차 입고하시고 견적 보고 보험 해도 되지 않습니까?
"뒷범퍼 교체라도 하면 얼마 나올 줄 알고요? 그리고 접수번호가 있어야 렌트를 할 거 아닙니까?"
-레..렌트요..?
"당장 보험사에 전화하세요."
뭔가 오늘 남은 하루가 길 것 같았다.
오전반차 쓰고 대구 서비스센터로 슝. 가는 동안 근처 렌트카 업체 몇 곳에 전화를 돌려봤다.
"사고대차 문의 드리려고요. 상대 과실 백프론데."
마법의 문장이다. 태어나서 이리도 극진한 친절을 받아본 적이 많지 않다.
아쉬운건, 법이 바뀌어 동급 차량의 기준이 배기량으로 결정된다는 점이다. 아우디나 BMW 타 보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내 차는 배기량이 2000조차 되지 않는 하이브리드 차량인지라 대차를 하면 아반떼가 나온다고.
비슷한 가격대 차를 렌트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악법이다 악법.
하지만 나는 믿고 있다. 규제가 생기면 그 규제를 피하기 위한 천재들이 반드시 생겨난다는 것을. 그리하여 몇 번째 전화를 돌리다 보니,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 하이브리드로 하시면 돼요. 국내 하이브리드는 배기량이 다 1600이거든요.
"오.. 사장님 부탁드립니다 그 중에 제일 비싼게 뭔가요?"
우리는 제법 말이 잘 통했다.
원래 나는 물건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성격이라 내 차를 누가 긁거나, 문콕을 해도 사과를 받으면 기분이 풀린다. 그래, 운전에는 항상 변수가 많으며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아무리 큰 접촉사고가 났어도 먼저 사과하는 분은 전부 선처해드렸다.
그런데 이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사과를 하지 않으시더라.
"왜 그럴까?"
- 인정하면 끌려가서 두들겨 맞던 시대를 살던 사람이라 그런거 아닐까?
"그런가? 근데 요즘 세상에는 인정하고 사과하는게 맞지 않아?"
- 그렇긴 하지. 너 전에도 문콕하고 도망가던 사람 잡아서 참교육했잖아.
"그치, 뺑소니 현행범. 왜 미안합니다라는 마법의 단어를 안 꺼낼까? 나 전에 조폭 형님 에쿠스 뒷범퍼 박살냈는데 그랜절 박고 선처받은 썰 이야기해줬었냐?"
- 벌써 세 번은 들었다.
친구와 통화를 하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오늘만은 기름이 아깝지 않다. 스포츠모드를 켜고 밟았다.
공식 서비스센터에 차를 입고했다.

오늘은 금요일. 벤츠 서비스센터는 평일에만 운영된다. 그리고 차량 대수에 비해 센터가 적어 항상 줄이 길다. 그 말인즉슨, 오늘 차를 입고하면 주말 내내 아무런 수리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렌트는 나온다.
담당 정비사님께서 환부를 보시더니 말씀하신다.
"컴파운드 하셨어요? 선처해주시려다가 도저히 안 돼서 오셨구나."
"아뇨 가해자가 새벽에 컴파운드로 닦아놨더라고요."
내 대답을 들은 기사님께서는 빵 터져서 반으로 접히면서 웃으셨다.
"수리에 시간이 좀 걸릴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이렇게 말하며 그는 내게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 온다. 마스크 아래 가려진 그의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리라.
"제가 좀 느긋한 성격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건 상관없으니 꼼꼼하게 봐 주세요."
라운지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포도쥬스를 홀짝이며 답했다. 우리는 마음이 썩 잘 통했다.
접수를 마치고 나오니 렌트카 사장님이 차를 갖고 와 계셨다.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즐겁게 웃었다.
그리하여 나는 국산 하이브리드 엔진의 맛을 보며 안동으로 복귀했다. 친구들이랑 차 구경도 하고, 시승도 하고. 재미있게 놀았다.
물론 내 차 가격의 절반밖에 안 되는 차라 아쉽기는 하다만. 넓고 쾌적하더라. 투싼 하이브리드 좋다. 잘 만들었다. 그래도 니로가 최고다.
아까 센터에서 나눴던 대화가 귓가에서 아른거린다.
"그래서 수리 견적은 얼마나 나올까요?"
"빠르면 다음주나 돼서 나올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감사합니다."
"ㅋㅋㅋ"
"ㅋㅋㅋㅋ"
2022년 1월 21일
새해 첫 광인을 추억하며
그리고 소중한 내 차의 순결을 추모하며
보험이력 슬프다
제 글이 재미있으셨나요?
제가 쓴 책은 더욱 재미있답니다!
반병현(Byunghyun Ban)
반병현의 포트폴리오 - 저서, 논문, 특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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