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쓰는 엔지니어
비트코인 탄생의 경제적 배경 본문
이 글은 비트코인의 제네시스블럭에 기재된 영국의 구제금융 기사 제목에 근거하여 사토시 나카모토가 중앙은행의 준재정활동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 연준의 AIG의 구제금융 지원 확정일로부터 한 달 뒤에 비트코인 백서가 공개된 것을 근거로 비트코인의 탄생이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를 불러온 연준과 금융권의 방만한 운영에 대한 반감에서 탄생했다는 견해에 따르고 있습니다.
1. 현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미 일어난 현상을 관찰하고 이해할 때에는 우리의 주관과 신념을 살짝 내려두고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이 꽤나 도움이 됩니다. 이미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는 자산 취급을 받고 있으며, 전 세계 사람들이 투자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미 국제 경제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가상화폐를 이해하기 위하여 조금 관대한 마음을 가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가상화폐는 이미 성공한 경제적 현상이므로
가상화폐와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에 담긴 철학을 비판 없이 수용하되
그 한계에 대해서 명확히 인지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위와 같이 따뜻한 시각으로 블록체인 기술과 가상화폐를 바라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국제 경제를 쥐고 흔드는 존재인 가상화폐와 NFT, 그리고 메타버스에 대하여도 작가는 옹호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며, 그들이 성공한 이유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따라서 책을 덮으신 후에는 다시 냉철한 여러분으로 돌아와 이 현상의 한계와 문제점, 더 나아가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부작용은 없을지 사색해보시며 여러분 나름의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 보시기 바랍니다.
블록체인 기술이 실물경제에 깊게 침투하여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작가는 최초의 블록체인 기술인 비트코인이 만들어진 이유에 집중해 보려 합니다.
비트코인은 정부의 화폐 발행 체계에 반감을 가진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기술입니다. 이들은 정부가 지배하는 중앙화된 화폐 체계는 불공정하며, 개개인이 화폐 발행에 참여하는 탈중앙화(decentralization)된 화폐 발행 체계야말로 공정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중앙화된 화폐 발행 체계란 무엇이며, 탈중앙화는 무엇일까요?
이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 혹은 정부가 지배하는 화폐 발행 체계가 정말로 득보다 실이 많은지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더라도, 이들의 철학이 세계인의 공감을 샀기 때문에 이렇게 국제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부터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중앙은행 - 중앙화된 화폐 발행 체계
중앙화된 화폐 발행 체계란 화폐의 발행량과 유통량, 그리고 소각량을 하나의 거대한 기관(중앙은행)이 통제하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중앙은행은 불, 바퀴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는 시스템입니다.
소각 화폐나 권리를 소멸시키는 행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예시로는 대한민국의 화폐인 원화(₩)가 있으며, 원화를 관장하는 중앙은행은 한국은행입니다.
대한민국의 통화 유통량은 대한민국 한국은행에서 결정합니다. 한국은행은 매년 새로운 지폐와 동전을 얼마나 제작할 지 결정하여 한국조폐공사에 작업을 의뢰합니다. 조폐공사에서는 의뢰받은 수량만큼의 지폐와 동전을 제작하여 한국은행에 납품하고요.
조폐공사가 신권을 납품한다고 하여 그 돈이 바로 시중의 화폐 유통량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한국은행이 보유한 잔액 증가가 즉시 시중의 화폐량 증가로 이어지려면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돈을 인출하여 국민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수밖에는 없거든요.
그러면 언제 한국은행이 가진 화폐가 시중에 풀리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한국은행이 직접 돈을 지출하지 않으면서도 시중의 통화량을 조절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① 재정지출
재정지출은 정부가 세금을 지출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정부가 돈을 지출할 때에 한국은행에 쌓여 있던 돈이 조금씩 시중으로 풀려나갑니다. 예를 들면 공무원에게 월급을 지급하거나, 세금으로 각종 재정사업을 추진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정부는 한국은행에서 돈을 인출하여 각 기관에 전달하고, 각 기관에서는 다시 그 돈을 급여로 이체하거나 사업 진행을 위하여 민간 기업에 제공하는 형태입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에 묶여 있던 돈이 일반인에게 전달되면서, 시중의 통화 유통량이 증가합니다.
② 수출 증가
기업의 활발한 무역으로 인하여 통화 발행량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업의 수출량이 증가하면 국내로의 외화 유입량이 증가합니다. 기업은 확보한 외화를 원화로 환전하려 시도하고, 이 과정에서 한국은행은 외화를 흡수하면서 원화를 유출하게 됩니다. 한국은행이 환전의 대가로 지불한 원화는 시중으로 유통됩니다.
얼핏 보기에는 환율에 따라 원화와 외화가 같은 가치만큼 교환이 일어나 통화량에는 영향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외국에서 들여온 외화만큼 국내의 통화량이 증가한 것이므로 수출이 증가하면 국내 통화량이 증가합니다.
이와 정 반대 원리로 수입이 증가하면 국내의 통화량이 감소합니다. 기업이 원화를 외화로 환전하는 과정에서 한국은행은 원화를 흡수하고, 환전된 외화는 해외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③ 준재정활동(quasi-fiscal activities)
준재정활동에 의한 통화량 증가는 일종의 부정행위로 인한 통화량 증가에 해당합니다.
정부의 재정활동은 정부가 세금을 거두어 들여(재정수입), 다시 지출하는 행위(재정지출)를 의미합니다. 재정지출에 대해서는 ①에서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준재정활동은 중앙은행과 같은 공기업이 수행하는 활동 가운데, 정부 정책의 성격이 강한 활동을 의미합니다.
행정기관을 견제하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할 공기업이 행정기관의 뒤치닥꺼리를 도맡게 된다는 점에서 준재정활동은 공익성 저해 등 다양한 사회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2002년부터 2005년 사이에 각종 경제학 논문에서 한국은행의 준재정활동에 대하여 맹비난을 쏟아낸 바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03년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의 리포트는 한국은행의 준재정활동의 대표적 사례로 총액한도대출제도, 정부로의 미처분이익 잉여금 납입 등을 꼬집었습니다.
용어가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은행의 준재정활동에 대해서 일반인이 이해하거나 체감할 수 있는 사례는 많지 않으나, 정부가 재정지출로써 집행했어야 할 돈을 중앙은행이 대신 집행하는 형태의 준재정활동 역시 한국은행에 쌓여 있던 돈을 시중으로 유통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준재정활동은 일반적으로 선진국보다는 후진국에서 주로 발견되는 형태이며, 최근에는 한국은행의 준재정활동에 대한 비판 논문은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④ 공개시장운영
중앙은행이 국채나 공채 등의 유가증권을 매매하여 시중의 통화량을 조절하는 행위입니다.
국채 국가가 돈을 빌리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 국가로부터 돈과 이자를 받을 권리를 의미한다.
공채 중앙정부와 지자체를 제외한 공공기관이 돈을 빌리기 위하여 발행하는 채권. 공공기관으로부터 돈과 이자를 받을 권리를 의미한다.
유가증권 재산적 가치가 있는 증권이라는 뜻으로, 현금 또는 현금으로 교환 가능한 상품권, 주식, 채권 등을 의미한다.
국채는 국가가 현금이 필요할 때 발행하는 일종의 빚문서입니다. 국가는 국채를 발행하면서 “xx년 뒤에, 연이율 xx%를 적용하여 이 돈을 갚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합니다. 일반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 보다 국가에 돈을 빌려주는 편이 돈을 돌려받을 확률이 더욱 높아지므로, 사람들은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하면서 국채를 구매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양적완화 정책 등, 국가가 돈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정부는 국채를 발행하고 이 국채를 중앙은행이 구매합니다. 결과적으로 중앙은행이 보유한 현금이 정부로 이동하게 되고, 이 자금은 정부의 지출로 인하여 다시 민간으로 풀리며 통화량을 증가시킵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중앙은행이 기업의 채권을 구매하게 되면 중앙은행이 보유한 현금이 기업으로 직접 이동합니다.
반대로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려 물가가 오른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이 보유한 유가증권을 매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의 돈이 중앙은행으로 이동하여 시중에 풀린 돈이 일정 부분 회수됩니다.
⑤ 재할인율 조정
재할인율은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릴 때 지불하는 이자입니다. 한국은행이 재할인율을 높이면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더욱 적게 빌리게 될 것이며, 그만큼 시중은행은 민간 대출을 줄여나가게 됩니다. 반대로 재할인율이 낮아지면 시중은행이 한국은행으로부터 더욱 많은 돈을 빌릴 것이며, 그만큼 민간에 대출을 많이 내어주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행이 보유한 원화는 은행을 거쳐 민간으로 유통됩니다.
⑥ 지급준비율 조정
시중은행은 사람들이 맡긴 적금이나 예금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대출을 해 주고, 그 이자를 수입원으로 삼아 운영됩니다.
사람들이 은행에 맡긴 돈이 100만큼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은행은 욕심을 부려 사람들에게 대출을 100만큼 해 줬습니다. 이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성실하게 대출을 갚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대출금을 갚지 않아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은행이 보유한 잔고가 0이 되어버렸으므로 예금과 적금을 맡긴 사람들에게 돌려줄 돈이 없어지게 됩니다. 은행도 파산하겠지만 은행을 믿고 돈을 맡긴 사람들이 함께 피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지급준비율 제도는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도입된 제도입니다. 중앙은행은 지급준비율을 지정하여 은행에 통보합니다. 예를 들어 지급준비율이 20%라면, 은행은 가지고 있는 돈 100 중에서 20만큼은 안전하게 보관하여 두고, 80만큼만 대출을 내어 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보관해 두는 20만큼의 돈을 지급준비금이라고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법정지급준비율은 7%이며, 시중은행은 지급준비금을 한국은행의 계좌에 현금으로 보관해 둬야 합니다.
한국은행이 지급준비율을 낮추면 대출이 활발해져 시중의 통화량이 증가하고, 한국은행이 지급준비율을 높이면 대출이 줄어들어 시중의 통화량이 줄어듭니다.
미국의 경우 시중은행의 적극적인 예금 예치를 유도하기 위하여 지급준비금에도 이자를 제공하지만, 일본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반대로 은행으로부터 보관료를 징수합니다. “일본은 금리가 마이너스다.” 라는 이야기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⑦ 기준금리 조정
기준금리는 금리체계의 기준이 되는 금리를 의미합니다. 한국은행의 경우 7일물 환매조건부채권(RP)이라는 채권의 금리를 기준으로 삼으며 이 금리를 한국은행이 정책적으로 조정합니다. 이 채권은 “지금 채권을 구매하면 한국은행이 7일 뒤에 xx%만큼의 이자를 쳐서 갚겠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발행되는 채권입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24시간짜리 초단기채로 기준금리를 운영합니다.
은행의 입장에서 기준금리란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기대수익입니다. 한국은행의 채권을 구매하면 확정적으로 기준금리만큼의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행이 민간에 대출을 시행하여 이득을 보려면, 기준금리보다 높은 이자로 대출을 해 줘야만 합니다. 기준금리와 비슷하거나 더 낮은 이자로 대출을 줄 바에야 한국은행의 채권을 구매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니까요.
따라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조정하면 시중은행의 대출 이율이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기준금리가 낮아지면 시중금리가 낮아지며 대출이 쉬워져 민간에 돈이 많이 풀리고(통화량 상승), 기준금리가 올라가면 시중금리가 올라가며 대출을 받으려는 수요가 줄어들고, 오히려 빨리 대출을 갚으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민간에 돈이 풀리는 속도가 줄어들거나 오히려 민간의 돈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통화량 감소).
이와 같이 중앙은행은 경제상황에 따라 정책을 이리 저리 변경하면서 시중의 통화량을 조절합니다. 물가가 너무 오르면 통화 유통량을 줄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반대로 경제가 침체될 위기에 빠지면 통화량을 늘려 국민의 숨통을 열어 줍니다. 불, 바퀴와 함께 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대 발명품 중에 중앙은행이 손꼽히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중앙은행 제도가 항상 시중 통화 유통량을 적절하게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위 그래프는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금융기관 유동성 평균 잔액(Lf 평잔) 그래프입니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의 통화량 변화 추이라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통화량이 높으면 높을수록 국내 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현금이 많다는 의미로 해석하셔도 좋습니다.
Lf (금융기관 유동성) 시장의 통화량을 추론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현금 뿐 아니라 종합적인 금융기관의 유동성을 함께 포괄하는 개념이다. 협의통화와 광의통화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고, 2년물 이상의 채권도 일정 부분 반영한다.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제 나름대로 정책을 꾸려 통화량을 통제하고 있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2012년의 Lf평잔은 2,395조 원이었으나 2020년에는 4,311조 원에 달했습니다. 2021년에는 국민지원금 지급과 양적완화제도의 지속으로 인하여 훨씬 큰 증가폭이 예상됩니다.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연 평균 증가량은 7.62% 가량입니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2년부터 2020년까지의 대한민국 경제성장률은 연 평균 2.43%에 불과합니다. 경제성장률에 비하여 통화량의 증가속도가 지나치게 빠릅니다. 시장을 지탱하는 자산의 규모에 비하여 통화량이 급격하게 증가하면 현금의 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현금의 가치가 떨어지면 그만큼 같은 물건을 구매하기 위하여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통계청에서 조사한 소비자물가지수는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연 평균 1.08% 상승했습니다. 통계만 봐서는 딱히 통화량 증가가 문제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비자물가지수는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주요 품목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집값 상승에는 공감할 것입니다.
작가의 생각으로 대한민국의 급격한 통화량 증가가 부동산 가격 상승과 주가상승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전국 주택 매매 가격은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연 평균 2.09%씩 상승하고 있습니다만, 2020년 한 해 동안에는 5.36% 상승했습니다. 수도권 집값 가격은 2020년에만 6.49% 상승했고요.
시중에 돈이 풀리며 현금의 가치는 떨어지고 있지만, 부동산의 가치는 영원합니다. 현금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동일한 건물 하나를 구매하기 위하여 필요한 현금의 양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며, 현금가치의 하락이 투자심리를 부추겨 코스피 지수를 견인하고 동학 개미운동에 불을 붙여버린 것은 아닐까요?
만약 중앙은행이 작정하고 통화량을 줄여 집값을 떨어뜨리고, 이해관계자들이 집을 구매한 다음 갑작스럽게 통화량을 늘려 집값을 높이면 어떡하지요?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개인이 할 수 있는 대응 방안은 전혀 없다시피 합니다. 이는 선진국에서 쉽게 벌어지지 않을 문제이긴 합니다만, 중앙은행이 통제하는 중앙화된 화폐 발행 체계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합니다.
중앙은행이 신뢰와 양심을 잃어버리는 순간 경제체계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3. 중앙은행의 실패 - 금리를 내렸을 뿐인데
양적완화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코로나19사태로 인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이 적극적인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했거나, 아직도 시행 중입니다. 이에 많은 독자분들께서 양적완화라는 용어를 뉴스나 미디어에서 접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며, 그 돈으로 국채 등 시중의 채권을 적극적으로 구매하는 행위입니다. 자산이 정부에 흡수되며 그만큼의 현금이 시장에 유통되므로, 시장의 통화 유통량은 크게 증가합니다. 사실상 정부가 화폐를 무한정 새로 찍어내어 그 돈을 시중에 풀어버리는 행위라고 이해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한국은행도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하여 무제한 유동성 공급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
경제침체 극복을 꾀한다는 훌륭한 명분이 있습니다만, 정부가 돈을 무한정(이 점이 공개시장운영과의 주된 차이점임) 찍어내는 것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이어질 설명에 앞서, 화폐 발행을 주도하는 기관이 제한 없이 무한한 돈을 생산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하튼 국가적 규모의 경제 불황이 오면 시중의 통화량을 늘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부작용은 없을까요?
중앙은행의 통화량 조절 실패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일으킨 대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경제학자나 역사학자들은 대침체(Great Recession)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른 말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혹은 리만 브라더스 사태라고도 부릅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 있었던 미국 연방준비제도(미국의 중앙은행, 이하 연준)의 구제금융 정책이 비트코인을 탄생시킨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구제금융 정책이 무엇이길래 비트코인이 발명될 원동력이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21년, 미국의 연준은 닷컴버블과 계속되는 전쟁으로 위축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하여 통화량 증가를 꾀했습니다. 당시 연준의 의장이던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은 기준금리와 미국 국채 금리를 낮추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미국 국채를 구매하여 안정적인 고수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금리도 꽤나 높은 편이었으며, 미국이라는 강력한 국가가 돈을 떼먹을 리가 없다는 판단으로 미국 국민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개인과 증권사에서 적극적으로 미국 국채를 매입했습니다.
미국은 국채의 이자만큼 지속적인 지출을 부담해야 했고요. 앨런 그리스펀은 사람들이 미국의 세금으로 수익을 올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미국 국채 금리 인하를 예고했고, 기준금리를 인하했습니다. 여기서 국채 금리 인하가 첫 번째 폭탄이 되었고, 기준금리 인하가 두 번째 폭탄이 되었습니다. 이 두 대사건의 영향을 차례로 다뤄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폭탄이 터지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살펴보겠습니다.
① 기준금리 인하의 영향
기준금리 인하의 영향이 보다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므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금리가 낮아지게 되어 사람들은 훨씬 많은 대출을 받게 되었습니다. 2000년 8월 6.51%였던 미국의 기준금리는 연준의 지속적이고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하를 거치며 2003년 말 0.98%까지 떨어집니다.
은행 입장에서도 이율이 낮아졌기 때문에 대출 건수가 훨씬 많아져야 비슷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대출 영업에 나섰고요. 은행도 적극적으로 대출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부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모든 비극의 원동력이니까요.
대출이 활성화되면 너도나도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에서도 주택 구매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② 국채금리 인하의 영향
기준금리가 0.98%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국채금리도 함께 급락했습니다. 원래 미국채에 투자하여 큰 이익을 거두던 사람들은 다른 로우리스크-하이리턴 투자처를 애타게 찾게 되었습니다. 실탄(현금)은 잔뜩 있는데 표적이 없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민간에서 기준금리 인하를 틈타 새로운 파생상품을 대량으로 출시하여 이 곳으로 전 세계의 부가 몰리게 됩니다. 이것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지금부터 조금 더 상세하게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보겠습니다.
파생상품 주식, 채권 등의 전통적인 금융상품을 기초자산으로 하여 새로운 현금흐름을 발생시키는 증권
4. 금융기관의 탐욕이 낳은 비극
① 국채의 매력 상실과 누군가의 잔머리
금리도 저렴하겠다, A라는 사람이 큰 맘을 먹고 내집마련을 위해 은행으로부터 3억 원을 빌려 집을 구매합니다. 집에는 저당권을 설정합니다. 은행은 [A로부터 3억 원과 이자를 받기로 했음.] 이라는 채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담보대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은행이 머리를 굴립니다. 채권을 담보로 새로운 채권을 발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질권이라고 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시는 예금담보대출이나 보험계약대출이 있습니다.
예금담보대출 은행 계좌에 넣어둔 돈을 담보로 새로운 대출을 실행하는 것. 이를테면 당장 깰 수 없는 적금계좌에 들어 있는 돈 100을 담보로 제공하며 80가량의 돈을 빌리는 행위.
보험계약대출 보험환급금을 담보로 새로운 대출을 실행하는 것. 이를테면 보험계약 만기시 환급받을 수 있는 환급금 100을 담보로 하여 80가량의 돈을 빌리는 행위.
채권을 다시 담보삼는 과정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백화점 상품권을 예시로 생각하면 조금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10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은 백화점에서 10만 원어치의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가 담긴 채권입니다. 여러분이 친구에게 10만 원짜리 상품권을 담보로 맡기고 현금 8만원을 빌린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채권을 담보로 돈을 빌린 것입니다.
미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미국 은행권에서는 파생상품 전문 설계자들과 손잡고 주택담보대출의 저당권을 담보로 새로운 채권을 발행하여 판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이미 존재하는 권리로부터 새롭게 파생된 상품을 파생상품이라고 부릅니다.
A로부터 3억 원과 이자를 받는다.
은행이 가진 저당권은 위와 같은 문장이 적힌 상품권이라 생각해도 좋습니다. 은행은 이 상품권을 담보로 하는 채권을 발급합니다.
이 채권의 소유자에게 3억 원을 갚는다.
혹시 우리가 돈을 갚지 못하게 된다면
[A로부터 3억 원과 이자를 받는다.]라는 권리가 담긴 채권을 대신 준다.
은행은 이런 문구가 적힌 채권을 발급합니다. 그리고 이 채권을 2억 7천만 원 가량에 판매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구매자 입장에서는 2억 7천만 원을 투자하여 3억 원을 받을 수 있으므로 3천만 원 이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이 돈을 갚지 않을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고, 은행이 돈을 갚지 않더라도 [A로부터 3억 원과 이자를 받을 권리]를 얻을 수 있으므로 이득이라 생각하여 은행이 발행한 채권을 열심히 구매합니다.
이러한 파생상품을 자산 유동화 증권(ABS, Asset-Backed Securities)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자산을 유동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는 파생상품의 일종으로, 은행의 자산인 대출금 채권을 현금화(유동화)시킨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은행은 담보대출 채권 여러 개를 한데 모아, 고객의 위험도에 따라 등급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각 등급별로 대출 건들을 묶어 커다란 파생상품을 만들어 판매했습니다.
Prime 등급
재산도 많고 수입도 많은 고객
Alt-A 등급
Prime에 비해 상환능력이 떨어지지만 돈을 갚을 능력은 있는 고객
SubPrime 등급
돈을 갚지 못 할 확률이 높은 고객
은행은 ABS를 판매한 수익금을 가져가 당장 현금을 창출하게 됩니다.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 사람들은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은행에 집을 압류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루아침에 노숙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90% 이상의 채무자들이 아득바득 열심히 허리띠를 졸라 매며 대출금을 열심히 상환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ABS는 매우 안전한 투자상품으로 취급받았습니다.
ABS에 투자한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벌었을까요? 채무자가 돈을 성실하게 갚으면 투자자들이 돈을 벌고, 채무자가 돈을 떼먹으면 투자자들이 돈을 잃는 구조였습니다. 도박과 다름없는 구조였지요. 부도날 위험이 적은 프라임 등급 ABS는 그만큼 수익률이 낮았고, 부도의 위험이 큰 서브프라임 등급은 그만큼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은행 입장에서는 100이라는 규모의 돈을 일반인에게 대출해 주고, 저당권을 ABS로 팔아 또다시 100만큼의 현금을 손에 쥐게 됩니다. 그러면 이 현금을 또다시 대출해 주고 ABS로 판매하면? 또다시 100만큼의 현금이 들어오겠지요? 문자 그대로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돈 복사 버그 그 자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도가 날 수 있는 서브프라임 등급 ABS를 싼 값에 판매하여, 대출이 부도나덜도 투자자들에게 받은 돈으로 손실을 메꿀 수 있었습니다.
은행이 합법적인 돈 복사를 실행하면서 대출 리스크까지 상쇄시킨 덕분에 엄청난 규모의 민간 대출이 일어나며 시중의 통화량 또한 한도가 없는 것처럼 증가했으니 결과적으로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의 의도가 실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ABS가 등장하자마자 엄청난 규모의 투자금이 모였습니다. 전 세계의 증권사가 모두 관심을 가졌습니다. ABS에 3억 원을 투자한 사람은 집을 구매하는 사람에게 직접 3억 원을 지불한 것보다 훨씬 큰 위험을 감수합니다. 따라서 수익률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습니다. 부도 위험은 적은데 수익률은 높다니, 모두가 ABS에 열광하여 미국채에 대한 관심은 금새 시들해졌습니다.
ABS를 통하여 은행은 돈을 무한정 복사할 수 있으니 좋았고, 파생상품 설계자들은 운용수익을 얻었으니 좋았고, 투자자들은 엄청나게 높은 수익율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고, 대출이 쉬워진 데다가 돈이 많이 풀려 이자까지 낮으니 일반인들은 누구든지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었으니 좋았으며, 연준은 금리 하락에 따른 국민들의 반발이 적었으니 좋았습니다.
여기까지가 금리 인하가 불러온 나비효과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행복해 보였습니다.
② 이 좋은걸 왜 안 해요?
말도 안 되는 저금리에 너도 나도 영혼까지 끌어모아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즐거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니 현금의 가치가 떨어지며 집을 사면 순식간에 집값도 뛰었고요. 은행이 ABS를 활용하여 열심히 돈을 복사했지만, ABS의 판매 속도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미국 은행들은 한 번 더 창의력을 발휘하여 부채 담보부 증권(CDO, 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이라는 신제품을 출시하합니다. 단어를 풀어 보면 부채, 담보, 증권 셋으로 쪼갤 수 있습니다. 부채는 빚입니다. 부채 담보는 빚을 담보로 한다는 뜻이며, 부채 담보부 증권은 대출빚을 담보로 하는 증권상품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의 대출빚 담보는 ABS를 의미하고요.
즉, CDO는 ABS에서 한번 더 파생된 파생상품입니다. 은행들은 전국의 ABS를 한군데 모은 다음, 위험군별로 적절히 섞어서 [ABS의 수익률을 담보로 발행한 채권] 상품을 만들어 판매합니다. CDO에 투자한 사람들은 ABS가 고수익을 얻으면 그보다 더 큰 수익을 얻게 되며, ABS가 부도가 나면 쪽박을 차는 구조였습니다.
은행에서는 ABS로써는 판매 가치가 낮은, 부도 위험이 높은 채권들을 한데 묶어 CDO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간단했습니다.
한 지역, 한 두 사람의 주택담보대출이 부도가 날 가능성은 높지만 전국 각지에서 긁어모은 수 천 개의 대출이 동시에 부도가 날 가능성은 낮으므로, CDO는 리스크가 상쇄됐다.
부도 위험이 높은 채권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상품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채권에서 파생된 ABS는 하이퍼리스크 하이퍼리턴 상품이고요. 그런데 CDO는 하이퍼리턴 상품에서 한번 더 파생된 상품이므로 슈퍼 하이퍼 리턴 상품이면서도, 전국의 대출건이 섞여있다는 이유만으로 리스크가 상쇄된 로우리스크 상품이었습니다.
게다가 프라임이나 Alt-A 등급 ABS를 살짝식 섞으면 겉보기에는 평균 리스크가 Alt-A나 프라임에 근접해 보이도록 포장하기도 쉬웠고요. 멀쩡한 식재료 절반(프라임 채권)과 음식물 쓰레기(서브프라임 채권) 절반을 섞어놨더니 사람들이 줄 서서 사 먹는 맛집이 되어버린 격입니다.
호황기에 CDO의 연 수익률은 40%에 육박했습니다. 리스크는 낮은데 수익률은 엄청나니 많은 사람들이 CDO에 투자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증권사들이 열광했음은 불을 보듯 뻔했고요.
ABS만 해도 돈 복사에 가까운 행위였습니다만, CDO는 ABS를 묶어서 다시 한 번 판매하는 것이므로 정말로 허공에서 무한정의 돈을 쓸어담는 격이었습니다. 은행은 CDO로 돈 맛을 봐버리고, 더 많은 CDO를 출시하기 위하여 더 많은 고위험 ABS를 양산했습니다. CDO의 높은 수익률은 고위험 ABS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느정도의 신용도를 갖춘 사람은 모두들 대출을 받아 이미 집을 마련한 상황이었기에 더이상 정상적인 대출만 진행해서는 고위험 ABS를 창출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습니다.
③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은행은 더이상 정상적인 대출 심사로는 고위험 ABS를 창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행원들은 대출 실적 압박 속에서 양심적인 대출만을 집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출금을 갚을 능력이 없는 서브프라임 등급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대출이 무더기로 승인되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신용불량자를 상대로 수 억 원의 신규대출이 무더기로 승인된 상황입니다.
당시 은행은 서브프라임 대출 유치를 위하여 규제도 완화했습니다.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은 소득과 자산 증빙서류를 제출하는 대신 서류에 본인의 자산규모와 수입규모를 기재하는 것으로 대출심사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실제 자산 현황이나 수입현황에 대한 검증이 전혀 없는 상태로 대출 집행이 된 것입니다. 자산규모 20만원 대의 백수 김모씨도 서류에 "연봉 2억 원, 자산 10억 원 보유."라고 볼펜으로 대충 적기만 하면 1억 원이든 10억 원이든 대출이 즉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덕분에 은행은 고위험 ABS를 확보하여 대량의 CDO를 신규 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을 비롯하여 돈맛을 본 해외 국가의 자본이 대량으로 CDO를 구매하는 바람에 금새 고위험 ABS의 공급이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결국 은행은 NINA(No Income, No Asset) 대출을 실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재산도, 수입도 없는 사람도 신청만 하면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직 백수도 신청만 하면 주택 구매 자금으로 10억이건 20억이건 대출이 나왔습니다. 누구나 집을 쉽게 살 수 있는 상황이 되면서 집값은 폭등했고요.
뿐만 아니라 집값의 100%를 초과하는 대출도 쉽게 나왔습니다. 현재 집의 가치가 10억이라면, "조만간 이 집값은 10억보다 더 오를테니 10억보다 더 큰 돈을 대출해 주십쇼."라는 주장을 하는 고객이 있었고 은행에서도 이걸 받아들여 줬다는 이야기입니다.
덕분에 은행은 CDO를 열심히 출시하여 더 큰 돈을 끌어오게 되었고, 또다시 서브프라임 대출건의 공급이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은행에서는 점점 더 방만한 대출심사를 진행하여, 신청자가 실존인물인지 아닌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돈을 빌려주기에 이르렀습니다. 오하이오 주에서는 사망자 명의로 23건의 주택담보대출이 승인되었으며, 애완견 이름으로도 대출 승인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도날 수밖에 없는 대출건을 바탕으로 너무나 거대한 규모의 파생상품이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사상누각이라는 표현도 모자랍니다. 늪 위에 지어 올린 아파트라고나 할까요? 미국이 미쳐 돌아간 상황입니다. 이때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④ 전 국민의 내집마련을 위하여
당시 미국 정부는 한 가구 한 주택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연준은 시장 유동성 증가라는 명목으로 기준금리를 인하했습니다만, 어느새 정부의 표심 확보를 위한 정책을 위하여 낮은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부를 견제하며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할 중앙은행이 정권의 표심을 잡기 위한 도구로 변질된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준재정활동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국가의 경제를 통제하고 안정화시켜야 할 중앙은행이 정치권의 도구로 전락하여 모두에게 내집마련의 꿈을 이뤄주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시장 질서가 유지가 안 될 수밖에요.
⑤ Party is over. 예견된 재앙
연준의 방만한 운영으로 인하여 시중의 통화량은 거의 무한정 증가했습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봤던 사실이 하나 있지요. 자산의 양이 일정한데 통화량만 증가하면 현금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연준의 기준금리와 국채금리 인하가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했습니다. 이후에는 은행이 공격적인 대출을 통하여 시중에 현금을 유통시켰습니다. 그 다음에는 미국의 투자자들이 ABS를 구매하며 은행에 현금을 보태주었고, 이 현금은 또다시 대출을 통해 시중에 공급되며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했습니다. 후반에는 전 세계 투자자들이 CDO를 구매하며 전 세계의 현금이 미국의 은행으로 집중되었고, 이 돈은 또다시 대출을 통해 시중에 공급되었습니다.
은행은 돈 앞에 도덕성을 잃어버렸고, 사람들은 벼락거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주택 구입에 열을 올렸으며, 증권사는 CDO의 수익률에 눈이 돌아가버렸습니다. 정부는 지지율이 오르겠구나 생각하며 좋아하고 있었고요.
시중에 풀리는 현금이 많아지면서 점점 더 집값이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일찍 집을 산 사람들은 순식간에 몇 배의 수익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지금 집을 사지 않으면 영원히 집을 살 수 없다는 두려움에 공격적으로 집을 구매합니다. 대출도 쉬우니 매수 세력이 매도세력보다 훨씬 강성했겠지요?
그 두려움은 다시 대출을 가속하였고, CDO의 판매 증가로 이어졌으며, 또다시 시중 통화량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이 추세가 영원히 지속되었다면 미국의 집값은 영원히 폭등하며, 현금가치는 영원히 폭락하고, CDO의 수익률은 영원토록 아찔하리만치 높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금은 무한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국가의 투자사에서 CDO를 충분히 구매한 이후에는 더이상 미국 시장 내에 현금을 추가로 공급할만한 주체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시중에 풀리던 현금의 양이 더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산가치의 상승이 멈춘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어느 시점에 이르러 더이상 집값이 높아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집값 상승으로 인한 수익률은 점점 줄어들지만 대출 이자는 그대로였습니다. 당시 대출이자는 첫 2년간은 6%가량이었으나 이후에는 복리 12~20%가량으로 폭등했습니다. 서브프라임 등급은 신용도가 낮았으므로 그만큼 금리가 높았던 것입니다.
매월 나가는 이자는 일정한데 집값은 떨어지는 상황입니다. 그 말인즉슨 많은 사람들이 집을 다시 팔아치우더라도 대출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005년에 학회에서 이 리스크를 주장한 학자들이 있었으나 아무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2005년 한 해에만 주택 가격은 15% 상승했습니다. 2006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집값이 너무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이때 주택을 팔아치우고 대출을 갚았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때 빠져나갈 기회를 놓쳤습니다.
서브프라임 등급 고객들은 애초에 돈을 갚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었고, 실존인물이 아닌 경우도 있었으므로 당연히 연 복리 20%의 대출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2007년 갑작스레 미국의 부동산 버블이 터지며 순식간에 문제가 퍼져나갔습니다.
CDO는 [전국 각지의 모든 저신용자들이 동시에 부도날 리가 없으므로 리스크가 낮다]라는 전제 하에 로우 리스크로 평가받던 파생상품입니다. 그런데, 전국 각지의 모든 저신용자들이 동시에 부도가 나버렸네요.
CDO에 투자한 투자자들도 쪽박을 치게 되었으며, 채무자들이 담보로 제공한 집을 공매하여 은행이 현금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시중에 유통되던 현금의 양은 더욱 빠르게 은행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채무자가 연쇄적으로 부도가 나면 여기서 파생된 ABS도 부도가 났고, ABS에서 파생된 CDO도 부도가 났습니다. ABS와 CDO가 휴지조각이 되면서 그만큼 현금으로써의 가치도 사라졌고요.
결국 사상누각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시중에 유통되는 현금의 양이 줄어들면서 집값은 빠르게 떨어졌고, 더욱 많은 채무자들이 동시에 부도가 났습니다. 덕분에 더욱 많은 ABS와 CDO가 함께 부도가 났고, 더욱 큰 현금이 시중으로부터 은행에 흡수되었으며, 시장에서 더 큰 현금이 빠져나가면서 집값은 더 빠르게 떨어졌습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고 부릅니다. 서브프라임 등급 고객에게 모기지론(주택 담보대출)을 무리하게 퍼주다가 생긴 사태이니 말입니다.
⑥ 대침체의 시작
대부분의 자산을 CDO와 ABS에 투자했던 증권사와 은행도 파산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2008년 3월, CDO를 주로 취급하던 베어스턴스 투자은행은 CDO 판매실적이 부진하여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이어 2008년 6월에는 세계 4위 규모의 금융사인 리먼 브라더스 역시 파산 위기에 처합니다. 대부분의 자산을 CDO에 투자하고 있었기 때문이니다.
사실 그 당시 한국의 산업은행이 리먼브라더스를 인수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미국인들은 동방의 코리아 덕분에 미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다는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만, 산업은행은 9월 10일에 인수하지 않겠다는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리먼 브라더스의 주가는 하루 만에 45% 폭락했으며, 4일 뒤인 9월 14일 파산했습니다.
이 날로부터 전 세계 경제가 망가진 대침체, 즉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시작되었습니다.
2008년 9월 16일, 메릴린치 투자은행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인수됩니다. 자신들 또한 파산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움직인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 최대규모의 금융회사인 AIG 역시 파산 위기에 처합니다. AIG는 ABS, CDS 등이 부도날 경우 AIG가 대신 갚아준다는 내용의 보험을 대량으로 발행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국 연준은 같은 날인 9월 16일, AIG의 파산을 막기 위하여 대규모의 규제금융 지원을 결정합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그 자체였죠. 리먼브라더스가 신청한 구제금융은 거부했으면서 이틀 만에 AIG의 구제금융만 승인한 것을 두고도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대마불사 규모가 큰 기업이나 기관이 파산하면 연쇄적으로 수많은 경제 주체들이 타격을 입게 되므로 정부가 앞장서서 구제해야 한다는 뜻의 경제학 용어이다.
이후 미국 금융시장에 대한 불신은 역대 최고조에 달해 미국 증시가 폭락했으며, 그 여파는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대한민국 또한 영향권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코스피 지수는 890점까지 떨어졌고, 북미와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베네수엘라나 짐바브웨는 국가 자체가 부도가 나버렸습니다. 그 뒤에 벌어진 더욱 끔찍한 경제적 타격에 집중하기보다는, 당시의 여론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5. 더는 중앙화된 화폐 체계를 신뢰할 수 없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미국의 국민들과, 전 세계의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회생 불가능한 수준의 타격을 입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금융사의 CEO와 임직원들은 대규모의 보너스를 받아갔습니다.
이는 여론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국민들의 반감이 쌓여가던 와중에 대마불사를 이유로 리먼 사태의 주축이었던 AIG에 구제금융을 지원하겠다는 연준의 발표는,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폭거와도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준재정활동에 대하여 가볍게 공부했습니다. 맥킨지(Mackenzie, George A.)가 1996년에 출간한 서적인 "중앙은행의 준재정활동" 이라는 책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준재정활동은 크게 환율제도와 금융제도로 나뉘며, 금융제도와 관련된 준재정활동에는 대출보조, 여신한도, 구제금융 등이 포함됩니다.
구제금융은 중앙은행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구제금융을 실시하여 AIG를 살려내고야 말았습니다.
서민의 삶을 박살낸 조직에게 대규모의 세금을 지원하는 것도 아니꼬운데, 중앙은행의 행보 또한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한 달 뒤, 이에 반감을 가진 익명의 개발자가 논문 한 편을 발표합니다. 그 논문의 제목은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입니다. 네, 맞습니다. 비트코인의 등장입니다.
참고문헌
[1] 이승훈. "통화공급의 여러 경로." KDI 경제정보센터. 2011년 9월 30일. Web. 2021년 1월 4일.
[2]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통화량 추이." e-나라지표. 2021년 8월 18일. Web. 2021년 1월 4일.
[3] Koh, Youngsun. "한국은행의 준재정활동 (Quasi-Fiscal Activities of the Bank of Korea)." KDI Journal of Economic Policy 25.1 (2003): 99-145.
[4] 통계청. "소비자물가상승률." 국가지표체계 K indicator. 2021년 12월 31일. Web. 2022년 1월 4일.
[5] Nakamoto, Satoshi.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Decentralized Business Review (2008): 21260. Available at https://bitcoin.org/bitcoin.pdf.
[6] Mackenzie, Mr George A., and Mr Peter Stella. Quasi-fiscal operations of public financial institutions. International monetary fund, 1996.
[7] 리장영. "금융 포커스: 서브프라임 사태와 금융규제, 감독 강화방안." 주간금융브리프 17.16 (2008): 10-11.
[8] 신종협, 최형선, 최원. "과거 금융위기 사례분석을 통한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전망." 한국보험연구원 조사보고서. 권호:10-1. 2010.1 (2010): 1-135.
[9] Financial Crisis Inquiry Commission. The financial crisis inquiry report: The final report of the National Commission on the causes of the financial and economic crisis in the United States including dissenting views. Cosimo, Inc., 2011.
이 글은 생능출판사를 통해 출간될 예정인 신간 도서 원고의 일부입니다. 이번 주제가 너무 재미있어 과몰입하며 쓰다보니 분량 조절에 실패하여 전문을 책에 수록할 수 없게 된 관계로 브런치에 공개합니다. 책에는 위 내용이 축약되어 수록될 예정입니다.
신간 도서에서는 블록체인 -> NFT -> 메타버스로 이어지는 대형 패러다임이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이던 퍼텐셜이 폭발한 것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또한 가상화폐 자동매매 프로그램, NFT 자동생성 프로그램, NFT 자동 판매 프로그램 등 가만히 누워있는 동안에도 자동으로 돈을 벌어다주는 소프트웨어들이 무료로 동봉되어 제공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첨단기술 읽어주는 농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AI와 철학, 정치, 그리고 인공지능을 논하다 - ChatGPT (1) | 2023.01.07 |
---|---|
2. ChatGPT의 역사 (1) | 2023.01.07 |
1. ChatGPT에 사용된 기술 (0) | 2023.01.07 |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은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다 (2) | 2022.12.22 |
브라우저 전쟁 (0) | 2021.10.16 |
출간저서가 10권이 되었습니다 (0) | 2021.10.16 |
101가지 컴퓨터 활용팁 (0) | 2021.10.16 |
수학·통계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딥러닝 (0) | 2021.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