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하는 공익

혁신 못 하는 조직의 특징

halfbottle 2020. 5. 28.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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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딩하는 공익
국내도서
저자 : 반병현
출판 : 세창미디어 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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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공공기관이나 지자체에서 혁신 관련 강연을 요청하는 일이 잦다. 강연이라.


  필자는 한 명의 사회복무요원이지만 그 이전에 작가이자 개발자이자 스타트업 CTO다. 후자의 정체성들과 관련된 강연 요청은 사회복무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므로 일정이 맞고 재미있어 보인다면 거의 대부분 수락하고 있다. 덕분에 KCD 2019 같은 좋은 추억도 남길 수 있었다. 즐거운 추억으로 남길 수만 있다면 강연료를 전혀 받지 않고도 다니고 있다. 어차피 못 받는 입장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사회복무요원으로서의 필자를 초청하는 경우는 기준이 확 올라간다. 필자는 이를 사회복무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기에 병역법에서 정한 노역 시간 외에는 절대로 수락할 생각이 없다. 그러다 보면 또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강연의 취지가 마음에 들고, 전화 준 공무원의 진심이 느껴져서 필자가 수락하더라도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공공기관이 공익적인 목적으로 출장을 요청하는 것이므로 공문 한 장이면 출장 허가는 쉽게 난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다.


  우선 필자의 개인 출장으로 처리할 경우 출장비를 안동 노동청에서 부담하게 된다. 그런데 애초 공익의 출장은 안동 노동청의 본 업무가 아니므로 당연히 예산이 편성되어 있지 않다. 안동 노동청은 없는 예산을 따와서 필자의 출장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혼자 출장을 다녀오다 사고가 나면 처리가 곤란하기 때문에 인솔공무원이 동행해야 한다고. 그러면 복무지에서는 하루에 인원이 두 명 비는 데다가, 없는 예산을 짜내서 출장비도 2인분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를 가장 깔끔하게 해결하려면 강연을 요청한 기관에서 공무원이 차를 타고 안동까지 와 필자를 데려갔다가, 일정이 끝나면 다시 안동으로 되돌려 놓으면 된다. 그러면서 출장비는 해당 기관이 자체 예산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난색을 표한다.


  강연은 초청하고 싶지만 부담은 우리 청에 지우려는 기관뿐인 것이다. 안동 노동청의 부담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피곤하게 다른 지역에 무료로 강연하러 다녀올 이유는 없으므로 앞으로는 관공서 초청을 수락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자고로 군인을 보고 싶으면 치킨을 싸 들고 부대에 면회를 가는 게 상식이다. 기관에서 버스 대절해서 안동 노동청을 방문하는 방향으로 일정을 잡으면 서로가 좋지 않은가. 안동 노동청 5층에는 대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도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 있다. 대체 관공서에서 필자를 불러서 어떤 이득을 볼 수 있겠는가? 기관 혁신에 도움을 받고 싶다면 온라인으로 자문을 요청하거나 의결권을 가진 소수의 기획자가 안동을 방문하면 될 일이다. 의왕시청에서 이렇게 했었다. 지금껏 필자가 해 줬던 자문 중에서 가장 실용적인 레벨의 내용을 높은 해상도로 전달할 수 있었다. 반대로 경남도청에서는 대부분의 공무원이 모이는 자리에서 필자가 강연을 해 주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청중 수가 늘어날수록 이야기의 전문성은 희석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한 시간 정도 재미있게 떠들다 올 수는 있겠지만 청중들에게 남는 게 없지 않겠는가?


  정말 혁신에 도움을 받고 싶다면 소수의 기획자와 대면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게 아니라 단순히 최근 이슈가 된 사람을 데려오고 싶은 것이 동기라면 평일에 연차 쓰고 개인적으로 안동을 방문하는 게 맞다. 세금으로 덕질하지 말자. 굳이 공익 한 명 불러오려고 일정 잡고 행사 준비하느라 국민들이 납부한 소중한 세금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속은 없는데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관공서 행사를 보면 세금 꼬박꼬박 정직하게 납부하던 사람으로서 화가 난다.


  부디 앞으로는 필자가 전시행정과 탁상행정에 엮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서론이 길어졌다. 굳이 공익 한 명 데려오려고 복잡한 절차 거칠 것 없이, 아래 글이나 캡처해서 청내 게시판에 올리는 것이 혁신에는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혁신을 못 하는 한국형 조직의 가장 큰 특징은 혁신과 개선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혁신을 추진하는 사람도, 기획하는 사람도, 구현하는 사람도 혁신의 뜻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 혁신의 혁 자는 바꿀 혁(革) 자를 쓴다. 혁명의 혁 자와 같은 한자다.


  본디 혁명이란 역성혁명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왕조의 성씨를 바꾸고 천명을 바꾼다는 뜻이다. 여기서 역성이 탈락하고 천명을 바꾼다는 뜻의 혁명이라는 단어만 남아 사용되고 있다. 군주의 자리가 세습되지 않는 사회로 변화한 역사적 흐름과 몹시도 어울리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비록 혁신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혁명이라는 단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현대사회에서 혁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감은 혁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혁신이라 부르는 현상이나 기술들을 잘 살펴보면 세상을 뒤집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인터넷이 그랬고, 스마트폰이 그랬으며, 인공지능이 그랬다. 이미 우리는 일상에서 혁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혁신을 일종의 혁명이라 생각한다. 혁신이 일어나면 기존 체계가 붕괴하고 단기간에 큰 파급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미한 개선을 혁신이라 착각하는 기획자들이 많다. 혁신을 기획하는 위치에 앉아 월급을 받아먹으면서 혁신이 가져올 파급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니 혁신이 올바르게 추진될 턱이 있나.


  심지어는 혁신을 명령한 사람도 혁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있다. 일단 지시를 하달받았으니 아랫사람들은 뭐라도 성과를 내야 하는데, 상세한 지침도 없고 업무 분업에 대한 프로토콜도 없다.


  우발적인 발명은 실무자의 영감이 중요하지만 기획적이고 조직적인 의도된 혁신의 경우에는 문제 수집이 가장 중요하다. 기획자는 어떤 분야를 혁신할 것인지 뛰어난 통찰력으로 결정해야 한다. 단, 기획자는 실무와 떠나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반드시 여러 가지 후보를 뽑아야 한다. 이 후보를 실무진과 논의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진단해야 한다. 조속히 해결될 필요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고, 해결되었을 때 파급력이 높은 문제일수록 해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문제가 어느 정도 결정되었다면 그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볼 차례다. 실업급여 수첩을 예시로 들어 보겠다. 막연히 기획단계에서는 종이 수첩 자체가 문제라고 지목되었을 수 있지만 이후 이 수첩을 생산하는 게 문젠지, 보관하는 게 문젠지, 민원인들이 소지하는 게 문젠지, 기록 작성을 수기로 하는 게 문젠지를 진단해야 한다.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병목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진단할 때에는 개인의 취향이나 직관 따위 아니라 숫자를 봐야 한다. 통계만이 객관적인 지표다. 예를 들어 온라인으로 신청 가능한 A라는 서비스가 있다고 치자. 사용자들이 회원가입부터 신청을 완료하기까지 어떤 페이지에 몇 초 동안 머무르고, 어떤 버튼을 몇 번 눌렀는지 기록을 전부 서버에 남길 수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가장 사람들이 복잡하고 어렵게 느끼는 프로세스가 어떤 절차인지 객관적으로 분석해 낼 수 있다.


  반드시 객관적인 지표를 토대로 문제를 진단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해결할 필요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된다. 물론 당신이 스티브잡스만큼 뛰어난 사람이라면 전혀 상관없다. 그는 문제가 아닌 문제를 해결했지만 전 세계를 뒤집어 놨으니까.


  기획자에게 필요한 통찰이란 어떤 숫자를 어떻게 수집할 것인지 결정하고 수집된 숫자를 해석하는 역량을 뜻한다. 통찰이 없다면 없다면 외부로부터 자문을 구하거나 직책을 내려놓아야 한다.


  실무자는 문제점을 보고하는 사람이지 해결방안을 고안해 내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기획자가 할 일이다. 이것을 실무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그런데 답답한 조직이 정말 많다. 직원들이나 하위기관을 평가할 때 혁신을 평가지표에 집어넣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은 다급하게 뭐라도 실적을 평가받기 위해 시간과 역량을 낭비한다. 그러면 조악한 개선안들이 단기간에 모이긴 하겠지만, 글쎄. 덕분에 당신의 조직은 소중한 생산성을 낭비했다. 차라리 같은 시간에 문제를 수집했다면 좀 더 혁신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앞서 말했듯 혁신이란 원래 파급력이 빠르고 크다. 그렇기에 혁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파급이 두렵고 책임이 겁이 난다면 혁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니, 애초에 실패를 겁내면서도 객관적인 지표를 수집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분들도 계신다.


  위에서 시켜서 혁신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도저히 방법도 안 떠오르고 본인의 역량도 부족한 것 같다면 구글에 애자일(Agile)이라 검색해 보기를 바란다. 스타트업 방법론이지만 느리고 무거운 조직이 혁신을 달성하는 데 적용하면 더 유용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의결권 있는 기획자만 모인 자리에서는 위의 이야기들을 주로 해 주는 편이다. 불특정 다수가 듣는 강연에서는, 글쎄.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는 것 같다.


  필자에게 행정혁신 강연을 요청해도 위와 같은 기초적인 이야기들을 더 낮은 해상력으로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관공서에서 무리하게 필자에게 출장요청을 하지 말고 이 글을 정독하면 좋겠다. 아예 공익 말고 제대로 된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면 더 좋고. 이 글을 읽고서 구체적인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면 소수의 인원으로 안동으로 출장을 오기를 바란다. 아주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맛있는 것 사 오시면 더 좋고. 참고로 필자는 과일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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