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하는 공익

공익근무 중에 논문을 써도 될까?

halfbottle 2020. 5. 2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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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딩하는 공익
국내도서
저자 : 반병현
출판 : 세창미디어 2020.04.27
상세보기

 

  몇 년 전이더라. 송유근 군과 김웅용 씨가 만나 대담을 나눈 이야기를 뉴스 기사로 봤었다. 대한민국에서 천재라는 키워드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하니 호기심이 일어 기사를 클릭했다.  군 입대를 앞둔 송유근 군은 군대에서 논문도 쓰면서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김웅용씨가 현실적이지 못 하다고 타일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군 복무 중에 논문이라니 쉽지 않다.


  그런데 필자가 그러고 있었다. 지난 한 주 동안 논문을 썼다. 두 개 썼다. 대학원 시절에도 이렇게 성실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먹음직스러운 데이터가 있으니 연구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데이터를 수집하느라 고생한 이민우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한다.


  파이썬으로 만든 업무 자동화 스크립트들을 통해 확보한 시간도 있고, 주어지는 일만 확실하게 처리하면 별도로 터치가 없기도 해서 시간확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병무청에서 허락해 주느냐.


  지난 겨울, 병무청 복무관리관에게 전화로 직접 물어봤다. 국제학회에 논문을 투고하거나 가서 발표를 해도 되는지. 복무관리관은 이런 사례가 처음이긴 한데, 마침 행사가 있어 사회복무요원 복무관리관들이 많이 모여 있으니 그 자리에서 한번 이야기를 꺼내 보시기로 하셨다. 복무관리관들끼리 모여 논의한 바는 아래와 같았다.


  1. 개인이 쌓은 지식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는 수능시험이나 공무원시험 응시는 법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2. 하물며 개인이 쌓은 지식을 전 세계를 위해 무료로 공개하는 자리가 제한되지는 않을 것 같다.

  3. 발표 또한 휴가를 쓰고 다녀온다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

  4.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익이 발생하면 안 된다.


  아주 명쾌했다. 그래, 현역 군인들도 휴가 쓰고 수능 치러 다녀오잖아. 수능 응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행위이고. 학계에 지식을 발표하는 것은 후학에게 도움이 되는 공익적인 행위이니 괜찮을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안동 노동청에도 겸직허가를 제출했다.


  "이거 돈 받는 거 아니지?"

  "네. 이게 다 국제학계의 발전을 위한 행위입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데이터가 있어도 데이터 자체가 논문이 될 수는 없는 법. 동료가 필요했다. 아주 든든한. 그래서 류동훈이사를 꼬셨다. 통계학과를 갓 졸업했으며 향상심이 아주 뛰어난 친구다. 당장 실무에 투입 가능한 실력을 갖추기를 원하고 있기에 멍석을 깔아줬다.

 

  "나만 잘 따라오면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을거야. 그런데 굉장히 힘들거야. 어떻게 할래?"

  "실력만 늘 수 있으면 얼마든지 힘들어도 좋다. 그런데 뭘 하면 되는데?"

  "일단 데이터 프로세싱부터 해 보자. R로."

  "R? 안 익숙한데."

  "견뎌내고 나면 익숙해져 있을거야."

  "뭐라고?"

  "카이스트에서 겪어 보니까 알겠더라고. '이거 못 하면 집에 못 갑니다.' 하면 모두들 알아서 해 오더라고. 교육이란 이런 게 아닐까?" 

  "정신 나갔네."   

 

  한동안 그는 새벽 네 시가 넘어야 잠들 수 있었다.

 

 

태어나서 먹어 본 맥주 중 가장 맛있는 맥주였다

 

  주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침부터 필자의 자취방으로 찾아와 페어 코딩을 했다. 일 주일 사이 코드를 몇 천 줄이나 짜 왔더라. 기특한지고. 일단 스파게티 코드는 협업에 좋지 않으니 해결을 하고 넘어가야 했다. 혼자서 연구를 하는 상황이라면 사실 코드를 어떻게 짜든 큰 상관이 없다. 하지만 협업을 할 때에는 아니다. 연구실에서 선배들과 공동연구를 하다 보면, 모두가 코드를 짜는 습관도 다르고 실력도 천차만별이다 보니 항상 필자가 맞춰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오, 안 돼. 더이상은 이런 사태를 관망할 수 없다.


  필자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디자인패턴을 정했다. 필자는 메인함수는 무조건 수도 코드(pseudo code)처럼 작성한다. 변수명과 함수명은 명확해야 하며, 처음 읽는 사람도 이 코드가 어떻게 굴러가는 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복잡한 기능은 최대한 별도의 모듈로 만들어 뒷단으로 밀어넣는다. 그래야지만 잠이 온다. 객체지향과 모듈화의 철학을 설파하고, 예시를 보여주며 코드 몇 백 줄을 단축하는 시범을 보여줬다.


  "자, 따라해봐."

  "뭐라고?"


  맥주캔을 땄다. 시원하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는 친구가 고생하는 동안 먹는 맥주다.


  동훈의 역할이 끝난 뒤에는 오로지 필자의 일만 남았다. 논문을 작성하는 것이다. 논문을 쓰다 보면 항상 늙는 기분이다. 필자는 담배를 싫어하지만 논문을 쓰는 기간에는 흡연을 하는 편이다. 그만큼 고되고 힘든 작업이다. 그래도 동료와 함께 하니 많이 나을 것 같았다.


  일요일 밤이었다. 논문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던 중이었다. 그런데, 잘만 하면 한 번의 실험 데이터 세트로 논문 두 편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끔찍한 생각에 한 번 도달하고 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큰일이다.  

 

구제불능의 SNS 중독자다 정말

 

  긴장한 채로 잠에 들었다. 과연 이번 주 동안 논문 두 편을 다 쓸 수 있을까?


  점심시간에 상상텃밭 농장을 방문했다. 물소리를 들으며 풀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스트레스가 가라앉는다. 잠시 상추로 힐링하고 돌아가려는데 권영범 팀장이 말을 걸었다.

 

  "병현아, 동훈이 요즘 이상하다. 가만히 컴퓨터 두드리다가 칙칙폭폭 거리고 삐뽀삐뽀 거리고 상태가 안 좋아."

  "정상이다."

  "아, 진짜?"

  "그런데 까마귀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위험한 거니까 뒷목을 쳐서 기절시키고 바닥에 눕히도록 해."

  "까마귀 소리는 위험한거야?"

  "아마도? 내가 예전에 논문쓰다가 힘들어서 옥상에서 까악까악 거렸는데 그 모습을 선배한테 들켰거든. 그날 술 사주더라."

  "연구가 그렇게 힘든거구만. 근데 너 원래 담배 안 피지 않았냐?"

  "논문 쓰느라."

  "아. 인정합니다."


  논문 틀을 설계하고, 초안 작성을 시작하고 나니 더욱 구체적인 그림과 그래프, 도표가 필요했다. 이걸 가공하느라 동훈이는 죽어나가고 있었고 필자 또한 글을 쓰느라 갈려나가고 있었다.


  고생 끝에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삼일 만에.

SNS 중독 말기다

  나야 시원한 노동청에서 에어컨을 쐬면서 작업을 할 수 있었지만 친구들은 아니었다. 낮에는 상상텃밭 농장에서 생산직 업무도 처리했어야 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퇴근 후 쉬지도 못 하고 RFP(과제 수주를 위한 연구제안서)를 쓰러 갔으며 필자는 특허명세서를 써야 했다. 논문을 다 썼으면 특허를 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논문은 우선 아카이브에 업로드했다. 아카이브는 코넬대학교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전 세계의 공학자들이 학회나 저널발표에 앞서 자유롭게 논문을 업로드 할 수 있는 곳이다. 부끄러우니 논문 주소는 알려주지 않겠다. 흥.


  그리고 학회에도 제출했다. 복무 중에 디펜스까지 할 자신은 없으며 몇천 달러씩 하는 출간비(publication fee)를 납부할 여력도 없으므로 국제학회가 적당하다. 사회복무요원 신분과 경제력에 해외출국도 쉽지 않은 이슈이므로 IEEE에는 등재되어 있지만 한국에서 열리는 학회를 찾아 두 편 모두 제출했다. 논문이 억셉(accept)된다면 학회를 다녀와 후기 글을 남겨 보도록 하겠다.


  심신이 황폐해지는 데 삼일은 아주 길고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은 이 세상에 필자와 논문 단 둘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마 살면서 가장 깊게 집중한 채로 보낸 시간이 아니었을까. 이 기간 동안 건강이 얼마나 상했는지를 단적으로 느끼게 된 사건이 있었다.


  필자는 평소에 매운 음식을 아주 즐겨 먹는다. 그런데 매운 쌀국수를 먹고 몸이 엄청 아팠다. 위가 쓰리다 못해 위벽의 형체를 따라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지고 식은땀이 너무 많이 흘렀다. 같이 있던 친구가 많이 걱정했다. 응급실로 달려가 위세척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다행히 먹은 것을 토해 내고 오래 쉬니 괜찮아졌다. 너무 놀라 그 주는 새벽수영도 모두 쉬고 푹 잤다.


  오늘 류동훈, 이민우와 스터디 했다. 우리는 매주 모여 논문을 함께 읽고 새로운 연구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다. 일종의 랩미팅이나 다름없다. 헤어지는 길에 동훈이가 이런 말을 했다.


  "어제 교회 끝나고 집에 가자마자 아카이브부터 켜서 논문을 봤어. 너무 뿌듯한 거 있지."

  "글까지 직접 쓰게 되면 아마 그 쾌감이 몇 배는 더 커질거야."

  "나는 지금 수식만 봐도 그런 기분이 드는데?"

  "장담 하는데 내가 아니라 네가 글을 썼으면 정말 자식을 출산한 기분일걸? 그래서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아 제발 그만."

  "이번에 쓴 논문 있잖아. 그거 딥러닝으로 새로 하면 성능 더 좋게 나올거 같거든. 그걸 네가 하는거야."

  "또 잠 못 자겠구나."


  교학상장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함께 성장할 동료가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나 다름없다.


  내 지성과 능력을 언제든지 꺼내어 반들반들 광을 낼 수 있는 환경임에 감사하며, 내 지식을 세상에 전수할 수 있는 여건임에 감사한다. 현역으로 갔으면 이런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반 년만 더 일찍 태어나 면제를 받았더라면 더더욱 좋았겠지만.  


  무튼 이번에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며, 복무중에 논문을 두 편이나 쓸 수 있었다. 이제 코딩하는 공익이 아니라 연구하는 공익이다. 한 차례 시간배분을 하는 연습을 했으니 남은 복무기간 동안 몇 편의 논문을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복무 중에 논문을 완성한 공익이 흔하지는 않을텐데. 필자가 최초면 어떡하나 실없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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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워크 그룹 치즈케익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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