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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7월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필자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또다시 갇혀있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수영을 하고, 경치 좋은 곳에 차를 대고 글을 쓰다가 노동청으로 출근. 하루 종일 논문을 읽다가 오후에 20분가량 우편물을 정리하고 또다시 논문 삼매경. 퇴근 후에는 빨래와 설거지를 하고서 논문을 보다가 잠드는 나날들.
브런치를 통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필자는 매일 반복되는 일과를 견딜 수 없다. 단기적인 성취감을 자주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매번 변화가 있는 일상을 추구한다. 비록 노동청에서의 업무강도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스스로 원해서 논문을 읽고 있었지만 조금씩 마음속에서 스트레스가 한계치까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것을 제외하면 사교적인 활동도 전혀 하지 않고 있었기에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날도 며칠이나 있었다.
"사람 한 명 망가지는 것 정말 순식간이겠군."
이대로는 정신이 황폐해질 것 같아서 애완동물이라도 길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새벽 일찍 나가서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동안 애완동물을 혼자 방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그만두기로 했다. 반드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태다.
대학원 시절에는 지도교수도 있고 프로젝트 하나에 3~5명이 우르르 투입되어 일을 했다. 그런데 당시에 필자는 그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고 있었기에 삶의 질이라는 단어와는 대척점에 해당하는 지점에 있었다. 솔직히 많이 지쳐있었다.
그때 오랜만에 직통전화가 울렸다. 044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필자의 개인 휴대전화로 걸려온 전화였다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시골 사람들은 낯선 지역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거든.
"안녕하세요, 행정안전부 김xx 팀장입니다. 반병현님과 통화 가능할까요?"
"네, 본인입니다."
강연 섭외 전화였다. 최근 몇 달간 거의 모든 섭외 건을 거절해왔지만 이번에는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루정도 다른 동네에 가서 여행 느낌도 느끼고, 단상에 서서 마이크도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좋은 기분전환이 될 것 같다.
"저희 과장님이 병현씨 신문 기사 스크랩해두셨거든요. 꼭 섭외해 오라고.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꼭 하고 싶거든요. 병무청이랑 노동청만 설득해 주시면 됩니다."
평소에 하던 멘트를 그대로 읊었다. 하도 요청이 잦다 보니 이제는 달달 외웠다. 기분이 약간 들떴다.
"날짜는 미정인데, 아마 2주 뒤에 할 것 같습니다."
다시 기분이 약간 가라앉았다. 앞으로 2주가량은 기분전환 없이 좀 더 고생하라는 뜻이겠구나.
일주일이 지났다. 필자는 여전히 논문의 늪에 빠져 있었다. 서울대 농대의 손xx교수가 미웠다. 그 연구실에서 나온 논문은 내용이 참 좋은 데다가 필자의 관심사와 분야가 잘 맞다 보니 책상 위에 널브러진 논문들 중 손xx교수 이름이 기재된 논문이 여러 편 있었다. 다음에 관악구에 놀러 가면 꼭 농대 학식에서 밥을 맛있게 먹고서는 맛없었다고 거짓말을 치리라 다짐했다. 슬슬 제정신이 아니었다.
김 팀장님과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다. 발표일자도 확정되었고 발표자료도 보내드렸다. 처음에는 4월에 필자를 불렀던 부서에서 다시 부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부서였다. 당시 필자를 섭외하셨던 분은 "타성에 젖은 공무원들에게 날카로운 일침을 전하는 강연"을 요청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냥 필자의 평소 스타일대로 마이크를 잡고 떠들다 오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이 행사는 행안부에서 주기적으로 개최하는 행사로, 전국의 공무원들이 모여서 공직사회 바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배워가는 포럼이라고 한다. 이번 포럼의 주제는 RPA(Robotic Process Automation)인데 쉽게 말하면 업무 자동화다. 필자의 경우 전국적으로 어그로를 끌었던 적도 있고, 일반인을 위한 업무 자동화 책도 쓰고 있는 중이니 그럭저럭 이번 행사와 핏이 맞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다른 연사자 명단을 보니 대기업 팀장님들과 업계 1위 벤처기업 대표님이 오신다고. 아니 제가 저분들 사이에 끼여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살려주세요!
처음에는 RPA가 무엇인지부터 소개해서 간단한 RPA를 기획하고 발주를 넣는 과정까지를 다루어 보려고 했는데 급격하게 노선을 바꿨다. 어차피 그런 어려운 개념들은 다른 분들이 훨씬 더 잘 설명해 주실 테니까.
전략을 다르게 짜기로 했다. 대기업은 딱딱한 이미지니까 대기업 팀장님은 굉장히 딱딱한 분이실 것 같다. 그리고 정부기관도 딱딱한 곳이잖은가. 정부기관의 요청으로 대기업 팀장이 와서 하는 강연은 굉장히 딱딱하고 진지하고 무겁고 지루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그들 사이에서 필자가 취할 수 있는 생존전략은 하나뿐이다.
"나는 재미에 집중한다."
지루한 강연 사이에 갑자기 난입한 젊은이가 스탠딩 코미디를 하듯이 빵빵 터뜨려 주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면 그럭저럭 기억에 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미야 뭐 타고난 입담을 믿기로 했다. 메시지만 준비하면 된다. 그리고 메시지라면 역시 공익적일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로스 해킹으로 50일 만에 대한민국을 움직였던 이야기를 소개하고, 그 대의명분을 "전 국민이 혜택을 입기를 바랐습니다."로 포장하면 그럴싸할 것 같았다. 곱씹어보니 그럴싸한 수준이 아니라 최고였다. 우리나라에 필자 말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겠는가?
그래서 이런 메시지를 대충 담은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정작 중점을 둔 부분은 강약 조절이다. 많은 사람들을 웃기려면 분위기를 쥐고 있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놓는 것이 중요하다. 도전, 300명의 공무원을 웃겨라! 막상 준비하려고 생각해 보니 준비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분위기 조절은 발표 중에 청중들 표정을 살피며 유기적으로 하는 것이지 허공에 대고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니까.
즉, 충분한 시간을 탕진하지도 못하고 필자는 다시 논문을 읽으러 돌아와야 했다는 이야기다. 너무 슬픈 이야기다.
며칠 지나서 전화가 걸려왔다.
"행사 공문이 왔는데 안동지청 출신이라길래. 궁금해서 전화해 봤어요. 당일에 차 태워줄까 해서."
예전에 안동 노동청 고용센터에서 소장으로 역임하셨고, 현재 영주지청으로 옮기신 팀장님이셨다. 필자의 선임은 이 분 밑에서 일했었다.
"자차 타고 가는구나. 당일에 악수나 해요."
외롭게 혼자 있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 다행이다. 그나저나 안동 참 좁다!
공익 신분이다 보니 사소한 문제도 있었으나 막상 행사 당일이 되니 신분증 확인도 안 하고 입장시켜주더라. 그리고 조금 덜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발표자료를 팀장님 메일로 보내드렸는데, 공직메일(공무원용 메일)은 대용량 첨부파일에 용량 제한이 있어서 필자의 ppt 파일을 다운로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당황하신 팀장님께서 발표자료를 usb에 담아 올 수 있는지 문의해 주셨으나 필자는 이미 그때 안동을 떠나 대전광역시까지 와 있었다. 발표자료는 드롭박스에 있었으나 관공서 내부 인터넷망으로는 드롭박스에 접근이 차단되어 있어 진퇴양난이었다.
USB-C 케이블을 빌려 스마트폰을 꽂아 봤지만 원인불명의 문제가 또 발생했다. 파일이 보이긴 하는데 실행이 안 되는 거다. 결국 팀장님은 정보자원관리원에 전화해서 IP 차단 잠시만 풀어달라고 요청하시고, 다른 분께서는 전산실 인력 불러오시고, 필자는 이게 왜 인식이 안되냐며 식은땀을 흘렸다. 우당탕탕 와장창창이었다. 다행히 전산실 선생님께서 가져오신 케이블은 정상적으로 작동이 됐다. 발표 시작도 전에 셔츠가 땀으로 젖었다.
"안 그래도 바깥사람이 안동 노동청에서 뭐 뉴스 나왔다고 하더라고. 나는 영주에 있어서 모른다고 했지." "아 그러셨구나. 지금 윤 소장님도 원래 영주에 계셨죠?"
"그렇지. 내 자리에 지금 윤 소장이 들어온 거지."
"그러면 제 선임도 보셨겠네요?"
"응. 걔 미술 하던 앤 데. 배.. 배.. 뭐더라."
"배 xx 맞죠?"
"아 맞아."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니 재미가 있었다. 다음에 영주지청에도 와서 강연을 해 달라고 하시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바로 옆 동네니까 부담도 전혀 안 되고.
한 시간 가량 지나 필자의 차례가 되었다. 행안부 공무원분께서 조용히 다가와 부탁하셨다.
"어려운 이야기나 전문용어는 좀 줄여주세요. 앞 강연들이 많이 어려웠어요."
"걱정 마세요. 처음부터 순한 맛으로 준비해 왔습니다."
영화관처럼 좌석이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강단에서도 청중의 표정이 하나하나 모두 보였다. 마이크를 잡았다. 이제는 이런 자리에 와도 긴장이 안 된다. 평소 하던 대로 분위기를 찢어놓았다. 나중에 실직을 하게 되면 스탠딩 코미디로 나가볼까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발표를 마무리했다.
"나는 병현씨 발표만 재미있더라."
"다른 분들은 유익했잖아요. 제 발표는 영양가가 없었어요."
"그래도 난 좋았어. 이제 가는 거야?"
"네, 저는 먼저 좀 도망칠게요. 다음에 봬요!"
공익의 근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세종에서 안동까지는 대충 세 시간 정도 걸리니까 사실 3시에 일정을 탈주해서 안동으로 퇴근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선심 써서 3시 반을 넘겨서 도망쳤다.
이제 서울에 들려 친구들을 태우고, 내일은 강원도로 떠나야 한다. 군인 면회를 위해. 교통체증을 견디며 수원까지 올라갔다. 수원을 벗어나는 데에만 한 시간 반 이상 걸렸다. 그때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형, 어떡하죠? 이번에 태풍 올라오는 것도 있고 최근에 목선 떠내려온 것도 있고 해서 면회 외출 외박 전부 잘렸어요! 사단장 지시라 풀릴 가능성도 없어 보여!"
세 시간 동안 운전해 서울 코앞까지 갔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너무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충 가까운 맥도날드에서 저녁을 때우고 안동으로 내려왔다. 도착하니 자정이 다 되었다.
그리고 마술같이 태풍은 소멸해버렸다. 다음날, 강원도 삼척 앞바다에는 구름 한 점 떠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뒤 팀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장관님께 보고를 드려야 한다고 하니 요약문을 쉽게 써 드렸다. 그리고 포상휴가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살짝 전해드렸다. 그런데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 행안부에서 4월 출장 때 주기로 한 포상휴가를 아직까지도 안 주고 있거든. 같은 부처니까 뭐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다음날 전화가 왔다.
"원래 워크스마트 포럼이 기업들 불러다가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도만 공무원들이 알아가는 자리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행안부 내부에 RPA(업무 자동화)를 실제로 도입해 보자고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번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으셨나 보네요."
"네 그런 것 같네요. 그래서 이번에 LG분이랑 병현님 모시고 회의를 진행하면 좋겠다 이야기가 나왔는데, 혹시 괜찮으신가요?"
"네, 뭐. 정부기관이 바뀌는 건 제가 바라던 바니까요. 다만 8월 셋째 주만 좀 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출장을 가게 되면 장소는 세종시죠?"
"네 맞습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예전에 고용노동부에서 필자를 불렀을 때에는 기관의 의지는 있었지만 노동부에서 권한이 없는 일이 많았다. 이후 청와대에서 필자를 불렀을 때에는 권한도 있고 범 부처적 사업으로 확장해 보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구체적인 논의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사실 필자를 부른 주된 목적은 필자가 쌓은 '코딩하는 공익'이라는 브랜드를 정부의 홍보용으로 활용하려던 목적이 더 크다. 4월 행안부 초청은 일회적 강연으로 끝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한민국 공공행정에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부처가 본격적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행안부가 바뀌면 공직사회가 바뀐다. 행정처리 프로세스가 완전히 바뀔지도 모른다.
공무원 한 명이 일주일에 하나씩 민원을 더 처리할 수 있으면 1년이면 50개의 민원을 더 처리할 수 있다. 전국에 공무원이 백만 명쯤 있으니 전 국민이 혜택을 입을 수 있다. 그런데, RPA가 도입되어 생기는 효용이 고작 일주일에 한 개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루에 두세 개씩 일을 더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대한민국의 관공서의 행정력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위에서부터 주도하는 혁신은 성공하기가 힘들다지만 적어도 행정안전부가 바뀌면 전국의 공무원이 영향을 받는다. 이건 혁신이라 부르기 충분하다. 그 혜택이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리라 기대해 본다. 업무 자동화가 공직사회에 정착하면 공무원 선발인원을 줄일 명분도 생기고, 그만큼 절약한 예산으로 실효성 있는 일자리 창출과 새로운 복지정책 마련에 힘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필자의 재미를 위해 출장요청을 수락했다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이다. 비록 필자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낮은 신분에 위치해 있지만 대한민국을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데 힘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러면 이제 증명서 한 장 떼려고 관공서를 대여섯 번씩 방문해야 하는 불편도 사라지지 않겠는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했던가? 틀린 말이다. 절이 싫으면 내 취향에 맞게 절을 리모델링해야한다.
이렇게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공익이 있는데, 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2020년 5월쯤 세창출판사를 통해 출판될 '코딩하는 공익'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여기서는 말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