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쓰는 엔지니어
만장일치의 역설 본문
생명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독일의 화학자인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이름을 한 번은 접하게 된다. 리비히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화학 물질을 몰래 가져와 화약을 만들어 학교에서 폭발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일생동안 굉장히 많은 업적을 남긴 천재다.
리비히가 제안한 많은 이론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리비히의 최소율 법칙'일 것이다. 식물이 성장하는 데 n가지 영양소가 필요하다고 할 때, 그중 가장 적게 존재하는 영양소가 식물의 생장에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많은 사람들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Dobenecks은 그림을 그렸다. 물통에 물을 아무리 담고 싶어도 가장 낮은 나무판 때문에 물을 담을 수 있는 상한선이 결정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한다. 너무 써먹을 곳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식물뿐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조직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어떤 조직에 속해있는 김천재 씨가 아래와 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김천재 씨의 아이디어는 가격과 성능, 효율 면에서 굉장히 우수하다. 김천재 씨는 이 아이디어를 조직이 받아들이면 조직이 빠르게 성장하여 더욱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굳게 확신한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팀 멤버들에게 회의를 요청했다.
김천재 씨의 아이디어에서 부족한 부분을 더욱 보완하고, 이 과정에서 서로 간의 시너지로 인해 멤버 한 명이 혼자서는 떠올릴 수 없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퐁퐁 솟아나는 회의가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김천재 씨가 낸 아이디어는 여러 멤버들의 발언을 포괄하는 과정에서 이리 깎이고 저리 깎여나간다. 비록 처음 아이디어에 비해 안정성과 편의성이 나아지긴 했지만, 사실상 별 경쟁력 없는 무의미한 결론으로 이어져버리는 것이다.
이 조직은 김천재라는 인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유능한 인재와 함께 일을 하려면 조직은 그보다 더 유능해야 한다.
만장일치로 일을 진행하다 보면 책임이 나누어지므로 마음은 편하겠지만 각각의 지표가 가장 능력치가 낮은 팀 멤버의 수준에 맞춰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팀 멤버 중 가장 성능이라는 지표에 대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역량에 맞춰서 성능이 떨어지고, 가장 효율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멤버의 능력에 맞게 효율이 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멤버 전원의 역량이 출중하다면 이상적인 회의 결과에 가까운 결과물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김천재 씨와 같은 경험을 자주 겪는다면 안타깝지만 당신이 속한 조직은 당신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을 능력이 되지 않는다. 급여를 떠나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쌓고 더욱 성숙한 프로젝트를 하고자 한다면 이직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혹 당신이 조직의 운영진이라면 내부에서 위와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보기 바란다. 조직이 리스크를 회피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기존의 아이디어를 깎아내리는 식으로 아이디어를 다듬기보다는 부족한 부분에 살을 덧대는 방법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가는 빈도가 조금씩 늘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장일치는 책임을 분산시키고 모두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최고의 의사 교류방법이 맞다. 하지만 만장일치제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그 결과가 발전일지 퇴보일지는 조직의 역량에 달려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아, 물론 능력이 부족한 보스가 멤버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일 때에도 이런 문제는 생길 수 있다. 이 경우 보스의 능력치보다 높은 수준의 성과가 안 나올 것이다. 어떤 의사결정방법을 따르던 상사가 무능하면 그 조직은 성장할 수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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