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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종말하는 꿈 (完)

halfbottle 2020. 5. 3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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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먼저 깨어난 원인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KTX 수준이었다. 상대론이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속도 범위가 아니다. 당연히 초기 의도와는 많은 괴리가 발생했다는 뜻일 것이다. 아까 본 뉴스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 KAIST 원자력공학과 학생들, 정지된 원전에 무단 침입하여 원전 재가동 성공. 한반도 전역 전력공급 원활.

 

  이 말인즉슨 한반도는 한때 전력공급에 차질을 겪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 여파로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았다. 이 방 내부가 서늘한 편이긴 하지만 인체 내부의 물질대사가 확연히 느려질 수준은 절대 아닌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옆에 누워 있는 저 두 사람 역시 조만간 깨어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방 안에는 식량도 물도 없기 때문에 나 혼자 일어나 있어 봐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뿐이다. 머리를 맞대어 탈출할 방법을 찾는 편이 더 나아보였다. 평소 하던대로 엉덩이를 걷어차서 두 사람을 깨웠다.

 

  "나 믿지? 일단 몸에 붙은거부터 떼고 천천히 일어나. 이야기는 나중에 해 줄게."

 

  그들이 몽롱한 정신을 다잡는 사이 다시 벽면에 붙은 컴퓨터로 향했다. 다행히 GPS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정보를 수신할 수 있었다. 현재 이 방은 경기도 평택시 인근에 있었다. 주거 구역은 없는 것 같았다.

 

  "야 여긴 어디냐? 뭔데 이렇게 추워?"

  "배고파."

 

  저들에게 간략히 현 상황을 요약해 알려줬다.

 

  "그럼 무작정 탈출하면 우리도 죽어. 글리코시놀레이트가 없으면. 근데 이 방 안에는 글리코시놀레이트가 많다고? 일단 글리코시놀레이트 발생장치를 먼저 찾아서 확보하고 탈출해야 하는거 아니야?"

 

  이민우 이사가 정곡을 찔렀다. 아주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적절한 도구가 없었다. 황재민 이사가 침대에 주렁주렁 달린 전극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이 전극 말라서 바스라지긴 했지만 대충 침 발라서 적시면 벽 같은데 붙일 수 있을 것 같은데? 220볼트로 지져버리면 잠금장치 고장낼 수 있는 거 아니야?"

 

  이 또한 그럴싸하게 들렸다.

 

  "좋아 한번 해 보자. 작전명은 피카츄다."

  "안 돼."  


  갑자기 장면이 전환되었다. 이게 꿈의 묘미 아니겠는가. 우리는 탈출에 성공했고 광화문 광장에 팬티만 입고 서 있었다. 행인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지나갔지만 별로 상관 없었다. 큰 길이지만 사람이 서너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근처에 유니클로 매장이 있길래 들어가 보았다. 유리로 된 자동문은 박살나 있었다. 계산대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지만 그럭저럭 입을만한 옷을 건질 수 있었다.

 

  우리는 걸어서 청와대까지 가기로 했다. 한복 대여점은 모두 문을 닫았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유리창이 모두 박살난 채로 불이 꺼져 있었다. 안에 분위기 엄청날 것 같다. 들어가 보고 싶었다. 도로는 텅텅 비어 있었지만 가끔씩 외제차가 한 두대씩 빠르게 지나다녔다.

 

  다리가 아플때쯤 연풍문에 도착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경비가 서 있기는 했는데 우리를 발견하니 경례를 했다. 굉장히 의아한 경험이었다. 당황해서 옆을 쳐다봤는데 그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경례를 받아 주고 마저 걸어갔다. 나도 어색하게 경례를 때리고 그 둘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연풍문에서 지문을 찍어 신원을 확인했다. 곧바로 내부로 안내받았다. 처음 보는 나이 많은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누구지? 일단 악수를 하긴 했는데 이 분은 본인 소개를 하지 않으신다. 황재민 이사가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도 건강해 보이십니다."

 

  아. 대통령이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우리가 깨어나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전해들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스마트폰과 체크카드를 하나씩 지급받았다.

 

  "조만간 관사를 청소하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금고에서 신분증과 기존에 사용하시던 카드를 회수해 오기까지 그 카드를 쓰시면 됩니다. 이번 달 연구용역비를 미리 넣어 두었습니다."

 

  아. 공무원 신분으로 연구를 계속하게 되는 거구나. 건물을 빠져나왔다.


  또 장면이 바뀌었다. 상가였다.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있었다. 확실히 자원이 많이 늘어난 것이 느껴진다. 스마트팩토리가 보급되어 그런지 인력이 줄었어도 산업계의 생산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게마다 진열된 물건이 넘쳐난다.

 

  나는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 출신 김정환 형과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내 적당한 코인노래방을 찾아 들어갔다. 이 형이 바로 정지된 원전에 잠입해 원전을 가동시킨 그 사람이다. 노래를 불렀다.

 

  "2년만에 세상에 나오니까 어때? 사람이 많이 줄었긴 한데 그래도 아직 다들 어떻게 살아남아서 세상이 굴러는 가고 있어."

 

  그의 한쪽 귀는 이미 하얗게 변해 있었다.

 

  "고작 2년인데 세상이 정말 많이 변했네. 참 기분이 묘해. 캡틴아메리카는 70년만에 세상에 돌아와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잠에서 깨버렸다. 닭들이 우렁차게 짖어대고 있었다. 나는 저 닭과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원룸을 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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