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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글

사골 육수가 섞인 면수를 마시고 싶다

halfbottle 2020. 5. 3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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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골 육수가 섞인 면수를 마시고 싶다.


작년, 신림동에서 고시공부 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역삼에 있는 학원까지 통학하기 위해 고시촌 쪽이 아니라 역 근처에 방을 구했다.

 

바로 아래층엔 술집이고, 옆 건물은 대놓고 화려하게 입간판 세워두고 영업하는 키스방이었다. 좌우로 즐비한 선술집, 밤 늦게 꺼질 줄 모르는 눈부신 모텔 led 간판들..

 

한 마디로 개판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

 

식사중에 주인 아주머니가 주방에 오셔서, 내 옆 방 사람이 몇주째 연락도 안 되고 인기척이 없으니 같이 좀 가 달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옆방에서 나는 악취에 불만이 있어왔기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말로만 듣던 그거구나. 오늘 시체를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아주머니 열쇠 가져와 주세요. 이거만 먹고 같이 가요."

 

그 와중에도 밥은 끝까지 다 먹었다. 고시원에서 무료로 제공해 주는 라면사리에, 오래된 반찬통에 들어있는 정체모를 스프를 한 숟갈 넣고 끓인 라면. 찝찔한 맛 밖에 느낄 수 없는 음식이지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시생이었기에.
구불구불한 복도를 따라 문제의 방 앞에 섰다. 일단 아주머니가 나서서 열쇠를 꽂으셨지만, 그대로 얼음이 되어 버리셨다.

 

손목을 잡아당겨 아주머니를 뒤로 밀쳐 내고, 눈을 감고 계시라고 말했다. 만감이 교차했지만 더이상 마음이 복잡해지기 전에 문을 벌컥 열어버렸다.

 

다행히 사람이 죽은 건 아니고 음식물 쓰레기만 썩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대량의 지식을 빠르게 복습하기 위해, 신림에서 만난 문과출신 누나한테 C와 데이터구조구론를 가르쳐 데구퀸을 만들어 놓기도 했고. 변리사 1차시험만 3번을 떨어졌다던데 아마 한번 더 떨어진것 같다. 그때 2차 준비할 시기가 아니었어요 누나. 좀더 겸손했어야지요. 아무튼 덕분에 저는 이득 봤어요. 고마워요.

 

라면 말고 다른게 너무 먹고 싶어서 허름한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시킨 적도 있었다. 어려 보이는 이모가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떡볶이를 접시에 담아 주고는 가게에 마련된 책상에 앉아 수학 모의고사를 풀기 시작하더라. 알고 보니 부모님이 힘들까봐 교대로 가게를 지키며 짬짬이 공부중인 고등학생이라고. 그 자리에서 카밍아웃 하고 가게 닫을때끼지 수학 과외 공짜로 해 주고 왔었지. 팔다 남은 불어터진 오뎅 몇개 주워먹기로 하고 과외비 퉁쳤는데. 올해 수능 잘 보기를.

 

고시원 옥상에 앉아 줄담배도 참 많이 태웠다. 안동 촌구석 와룡의 하늘은 별이 가득했는데 서울은 안 그러더라. 밤하늘이 뿌옇고 탁한게 뭔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그런 하늘 올려다 보며 내 숨을 토해내는게, 내가 뱉어내는 숨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게 마냥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보증금 없이 월세만 조금 내면 지하철 역 바로 앞에 있는 고시원에서도 살 수 있다. 또, 이런 곳에 사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막상 그 고시원에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통화를 엿들었던 건넛방의 아주머니는 몸에 암덩어리가 있다고. 인기척이 없던 그 방 말고, 반대쪽 옆 방에는 근처 헬스장에서 알바를 한다던 트레이너 형님이 살았다. 고시원이란게 워낙 방음이 안 되는 곳이다 보니 새벽마다 그 형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아침 일찍 2호선을 타고 역삼으로 통학했기에 신림에서의 추억은 모두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의 풍경 뿐인것 같다.
막쌈냉면이라고, 메밀면을 파는 가게가 고시원 근처에 있었다. 음식을 시키면 사골 육수 섞인 면수를 주전자째로 제공해 주는데, 가끔 그 면수만 따로 팔지는 않냐고 물어보면 어떨까 망설이곤 했다. 맛있거든.

 

그래. 신림에서의 맛이라고 하면 찝찔하고 꿉꿉한 공짜 라면맛과 이 면수 맛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초심이 필요한 때에 면수 한 잔 호로록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똥글을 쓰기 시작했음.

 

아무튼 통학 거리가 너무 먼게 답답해서 3개월 만에 역삼으로 이사했고, 훨씬 넒고 깨끗한 공간에서 지내게 되었다.
강남에서의 생활은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써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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