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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말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산으로만 둘러싸여 바다가 없는 동네에서 살던 소년에게 사방에 바다가 펼쳐진 제주도는 정말 신기한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사진을 더는 찍고 싶지 않아 졌다.
"내가 이 공간에 서서 느낀 감동과 이 순간의 감수성은 사진이 담아내지 못한다. 훗날 오늘의 감동을 다시 떠올리고자 한다면 사진을 꺼내볼 것이 아니라 이곳을 다시 한번 찾아오도록 하자."
폰을 집어넣고 두 눈에 최대한 많은 풍경을 새기려 애썼다. 이 이후 필자는 정말로 마음에 든 여행지에서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이번 KCD 2019도 비슷했던 것 같다. 많은 감동을 느낀 자리였지만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글로 다시 그날의 기분을 되짚어가는 것도 왜인지 그다지 내키지가 않더라.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보니 1편을 올리고서 이어지는 내용을 쓰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사실 준비과정과 발표에서 했던 발언들을 자유롭게 글로 옮길 수 있는 신분이었으면 글을 쓰기가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럴 수 없는 신분이 아닌가! 한탄은 이만 줄이고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 발을 들였던 그날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필자는 행사에 약간 늦게 도착했다. 행사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어려우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으나 건물 로비에 들어가는 순간 걱정이 싹 사라졌다. 누가 봐도 개발자임에 틀림없는 패션의 소유자들이 바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가면 분명히 행사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담인데 개발자의 패션에는 일정한 타입이 있는 것 같다. 다른 직종에 비해 취향의 폭이 상당히 좁은 것 아닐까.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개발자라면 올해 봄옷을 구매할 때에는 시도해 보지 않았던 스타일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엄청 큰 플래카드가 입구에 걸려있었다. 후원사도 빵빵하고 주최 커뮤니티도 굉장히 다채로웠다. 플래카드 바로 왼쪽에서는 여러 단체에서 부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기념품이 몹시 탐이 났다. 참가 등록을 하니 두툼한 봉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안에는 필기를 할 수 있는 태블릿 형태의 전자기기가 들어있었다. 신기한 기계를 받아 들고 나니 벌써부터 만족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등록 데스크에서 한빛미디어 조희진 차장님을 만났다. 잠시 뒤 송경석 마케팅팀 팀장님도 만나 뵙고 소개를 받았다. 아주 훤칠하고 첫인상이 밝은 분이셨다. 한빛 부스로 데려가서 기념품을 주셨는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여기를 한 바퀴 빠르게 돌면서 기념품을 챙겨야겠다."
참석하기를 정말 잘했다.
주최 커뮤니티를 비롯하여 후원기업 스티커를 챙겼다. 라인 DEV에서는 개발자 옷을 입고 있는 라인 프렌즈 캐릭터 스티커를 나눠줬다. 노트북과 에너지 드링크를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샐리와, 후드를 입고 컵라면을 먹으며 디버깅을 하고 있는 브라운 스티커가 너무 귀여워 바로 노트북에 붙여버렸다. 카카오에서는 후드티를 입은 라이언이 옆구리에 노트북을 끼고 킥보드를 타고 출근하는 장면을 스티커로 만들어 나누어 줬다. 정말 어쩜 이렇게 취향에 탄환을 꽂아 넣을 수 있담. 행복사(행복해서 죽음에 이르는 것)할 뻔했다.
주최 측에서 마련해준 식사 또한 몹시 만족스러웠다. 과일까지 있다니. 마침 눈 앞에 과일도 있겠다 한빛 분들과 식사를 함께하며 농업과 귀농을 소재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송경식 팀장님의 딸기 이야기다.
"딸기는 이제 저는 못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먹을게 어디 있어요, 애들 먹여야지."
역시 아버지는 위대하다.
점심을 먹고 어슬렁거리다 강연자 대기실로 납치당했다. 필자는 강연자 대기실이 있는 줄도 몰랐다. 막상 들어가 빈자리에 앉았는데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안 보이고 필자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아 보였다. 외로울 땐 역시 SNS다.
이 행사장에는 필자 말고 또 다른 코딩하는 공익도 와 계셨다. 변준석 님도 근무지에서 코딩으로 업무를 혁신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랜선 인맥이었는데 덕분에 실제로 만나 뵙고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재열 님이 정말로 인사를 주시고 쓱 지나가셨다. 모두 오늘 처음 뵙는 분이다. SNS가 이렇게 위대하다.
대기실로 돌아와 바로 노트북에 스티커를 붙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스티커를 붙이고 있으니 마음이 몹시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예쁜 캐릭터들을 보고 있자니 아직 발표자료 ppt만 만들었지 스크립트도 못 만들었고 발표 연습조차 한 번도 못 한 상태였음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래, 스크립트나 만들자. 다른 발표 참관은 무슨.
필자의 발표 순서는 마지막이었다. 대충 네 시간 동안 발표를 준비할 수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 기고를 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많이 정리되었기에 비교적 빠르게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작 시간을 오래 잡아먹은 건 완급조절이었다. 30분 내내 주구장창 지루한 이야기를 한다면 강연을 들으러 와 준 사람들에게 실례라고 생각했다.
이번 발표에서 굉장히 어려운 목표를 여러 개 동시에 달성하려고 욕심을 부렸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이번 발표의 목적이 아니었기에 청중들이 30분 동안 스탠딩 코미디를 시청하듯 즐기다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 과정에서 청중과 교감하고 싶었고, 오늘 강연을 듣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교훈을 하나씩은 심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교훈이 넛지가 되어 언젠가 청중들이 새로운 도전을 고민 중일 때 머릿속을 가볍게나마 스치고 지나가기를 바랐다. 결과적으로는 한 명이라도 좋으니 세상에 긍정적인 파급력을 행사하는 개발자가 등장해 주기를 바랐고.
욕심이 크니 괴롭더라. 하지만 그건 괜찮았다. 한 번 만들어 둔 강연자료는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 있으니까. 정말 필자를 괴롭힌 것은 "사람이 적게 오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었다. 아무래도 필자의 발표순서가 맨 마지막이다 보니 많은 분들이 필자의 발표를 안 듣고 집에 갈 것 같았다.
게다가 같은 시간대에 옆 트랙에서는 pandas를 주제로 강연이 진행되고, 그 옆 트랙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개발자님이 챗봇 만들기 워크숍을 진행 중이고, 그 옆 트랙에서는 케라스 코리아의 딥러닝 워크숍이 진행 중이었다. 요즘 엄청 핫 한 빅데이터와 딥러닝 사이에 끼여 있어서 더더욱 필자의 발표가 한산할 거라고 생각했다. 대기업 싸움에 시골 공익 등골 터진다! 스크린쿼터제라는 제도가 이래서 도입된 거구나. 갑자기 대한민국 영화 산업계에 연민과 공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소극적인 스크립트를 준비했다. 소극적이라는 게 다소곳하다거나 얌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필자의 다른 강연에 비해서 비교적 소극적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발표 중에 청중들 사이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슬라이드만 남기고 필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위해 청중보다 더 뒤로 이동해서 발표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동선은 많은 사람이 들어줄 때에나 효과적이므로 전혀 넣지 않았다.
네시쯤 되니까 당이 떨어져서 머리가 무겁고 몸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당장 간식코너로 뛰어가 젤리와 초코바를 잔뜩 챙겨 왔다. 한 명이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준비를 마무리했다.
필자의 차례가 되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왔냐면. 음..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다 싶었는데 끝이 없이 들어왔다. 정말로 당황했다. 생각이랑 너무 다른데? 당황하니 갑자기 출타했던 긴장감이 귀가했다.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프로젝터에 연결하는 사이 코딩이랑무관합니다만 윤성국님이 필자를 소개해 주셨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회복무요원이시죠! 코딩하는 공익 반병현 님입니다!"
소개사 중간에 청중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뭔가 시동이 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번 IR만 하다가, 웃으며 놀다가 가도 되는 발표를 해도 된다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가볍게 자기소개로 시작했다. 발표 초반에 라뽀를 형성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상관이 전혀 없는 먼 사람이 앞에서 떠드는 데에는 집중하기 힘들다. 친근감이 들고 공감이 가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런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더 큰 재미를 느끼게 되므로. 남의 이야기라는 인식을 부수는 것이 정말 어렵지만 중요한 일이다. 발표자와 청중 사이에는 어떤 가상의 울타리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넘어설 수 있다면 많은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중간중간 웃을 수 있는 요소를 정말 많이 집어넣었다. 결과적으로 상당히 만족스러운 발표였다고 자평한다. 청중과 교감도 정말 잘 되었다. 많은 분들이 필자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시고, 함께 웃어 주셔서 행복했다.
오래간만에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필자의 사인을 받아간 분도들 계시다. 그런데 갤노트에 S펜으로 사인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역시 개발자들, 창의력이 남다르다 정말. 혹시나 해서 필자의 아트워크 파트너인 정규민 디자이너와 전날 사인을 하나씩 만들었는데, 바로 다음날 써먹었다.
앞으로도 개발자 커뮤니티 행사는 꾸준히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동종업계 사람들이 우글우글하게 모이는 자린데, 그 안에서도 모두가 지향하는 방향이 다들 조금씩은 다르다. 전문성도 다르다. 아무나 붙잡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면 그게 곧 커다란 공부가 되는 것이다. 향상심이 있는 한 명의 개발자로서 놓치기 아까운 기회다.
고맙습니다, KCD! 고마워요 코무!
"와 되게 동안이세요! 아직 20대 후반으로 보여요!"
"저 27살인데요"
"..."
이런 대화가 여러 번 오갔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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